"조사팀 증거, 과거에도 증거력 부실로 배제"
나치 앞잡이 조직에 은신처 제공? "어불성설"
‘안네의 일기’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와 그 가족의 은신처를 알린 밀고자는 정말로 같은 유대인이었을까.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CBS방송 탐사보도 프로그램 ‘60분’을 통해 이러한 주장이 제기된 직후, 학계를 중심으로 반박이 잇따르고 있다. “결론이 지닌 무게와 파장에 비해 증거가 매우 부실하다”는 것이다.
이날 방송에서 전직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과 역사학자, 범죄학 전문가, 컴퓨터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조사팀은 안네 가족 밀고자로 유대인 공증사인 아놀드 판 덴 베르그라는 인물을 지목했다. 결정적 증거는 안네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받았다는 쪽지였다. 과거 수사관의 서류 더미에서 발견된 쪽지에는 판 덴 베르그가 밀고자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사팀의 추적 과정은 ‘안네 프랑크의 배신’이라는 책으로도 만들어져 방송 이틀 후인 18일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출간됐다.
18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판 덴 베르그는 ‘안네의 일기’ 연구자와 홀로코스트ㆍ제2차 세계대전 전공 학자들에게 낯선 이름은 아니다. 과거에도 수 차례 유력한 밀고자로 용의선상에 오르내렸던 인물이다. 2003년 ‘누가 안네 프랑크를 배신했나’라는 책을 쓴 네덜란드 역사가 다비트 바르나우도 판 덴 베르그를 용의자로 생각했으나 쪽지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서 결국 배제했다. 바르나우는 "심지어 1963년 밀고 사건을 조사했던 네덜란드 형사도 직접 안네의 아버지에게서 쪽지를 건네받고도 증거력이 약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책을 검토한 전문가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유대인문화지구 관장 에밀러 스레이버르는 “누군가라고 콕 집기에는 증거가 너무 희박하다”며 “수많은 추정에 기반해 혐의를 제기하지만 실제로는 한 조각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안네 프랑크의 집’ 박물관 관장 로날트 레오폴트도 “더 조사해야 할 새로운 정보를 제시할 뿐 결론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며 박물관 측은 이번 조사를 ‘사실’로 여기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책에는 판 덴 베르그가 유대인연합회를 통해 얻은 유대인 은신처 목록을 몰래 소지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실렸다. 유대인연합회는 유대인 통제ㆍ분열을 위해 나치가 만든 조직으로 1943년 해체됐다. 학자들은 이 대목도 ‘어불성설’이라며 의구심을 제기한다. “나치 탄압을 피해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소를 나치 앞잡이 조직에 제공했겠느냐”(전쟁ㆍ홀로코스트ㆍ인종학살연구소 연구원 라우린 파스텐하우트)는 지적이다. 아울러 유대인위원회가 이러한 목록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점도 꼬집었다.
스레이버르 관장은 “조사팀의 좋은 의도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역사적 사고와 맥락이 부족하다”며 “그것이 범죄 수사와 역사 연구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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