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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 근절 위한 '용역 보호 지침', 법원은 "어겨도 된다" 무용지물

입력
2022.01.25 14:30
수정
2022.01.25 15:1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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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 그 후]
<26>한수원·인천공항 용역노동자들 소송
법원 "법령이 아니라 대외적 구속력 없다"
결국 입법 필요...국회에선 논의 지지부진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2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정부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간착취,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간접고용(민간위탁·용역) 노동자들이 많다. 제대로 된 입법은 없고,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강제성이 없다"며 법원에서 그 효력을 부정당하기 일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2일 인천공항공사에서 열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정부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간착취,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간접고용(민간위탁·용역) 노동자들이 많다. 제대로 된 입법은 없고,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강제성이 없다"며 법원에서 그 효력을 부정당하기 일쑤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허, 참. 감사원에서도 우리 말이 맞다, 그래가. 저희도 소송하면 이거 된다 싶어가 했는데… 근데 져가지고, 허허. 그게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네.”

김성기 공공연대노조 발전분과위원장은 수화기 너머로 연신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일하는 용역노동자들이 한수원이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을 어겨가며 덜 지급한 임금을 달라고 낸 소송에서 패소해서다. 인천국제공항 경비 노동자들도 유사한 소송을 냈으나 최근 1심에서 졌다.

이 판결들이 함의하는 바는 크다. 정부가 용역근로자의 적정한 임금 책정과 중간착취 방지를 위해 마련한 가이드라인(지침)에 대해 법원이 “꼭 지켜야 할 강제성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은 입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한수원도, 인천공항도 지침 어겼는데

부산지법은 지난해 5월 27일 한수원에서 일한 용역노동자들이 한수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추가 임금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만 3년 전인 2018년 5월, 700여 명의 청소·경비·시설관리 노동자들은 소송을 냈다. 한수원이 보호지침을 어겨가며 용역업체들과 계약 시 인건비 예산을 깎아서 지급했고, 그 바람에 임금을 덜 받았으니 ‘못 받은 임금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해 1월 감사원이 '부적정하게 감액 지급한 게 맞다'고 판단을 내려준 게 결정적 계기였다. 액수는 28억여 원에 달했다. 한 사람당 최대 1,100만 원의 임금을 덜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지침상 기준에 미달하는 임금이 지급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보호지침은 법령이 아니며, 대외적 구속력이 없는 내부지침에 불과하다”는 이유를 댔다. “임금 등 고용조건은 사적 자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며, '공공기관의 경영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 자율성의 횡포가 지나쳐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시달리기 때문에 지침이 마련된 것인데 말이다.

같은 해 11월 24일 부산고법 역시 패소 판결하자, 노동자들은 결국 상고를 포기했고 판결은 확정됐다.

지난해 11월 5일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출국장이 출국 수속을 밟는 시민과 외국인들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5일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출국장이 출국 수속을 밟는 시민과 외국인들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하는 보안경비 노동자 1,000여 명도 지침 위반 등을 이유로 인천지법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지난 13일 1심에서 패소했다. 한 사람당 140만~190만 원, 총 17억여 원의 임금이었다.

인천지법은 "(용역근로자 보호지침은) 상급행정기관의 하급행정기관에 대한 업무처리지침에 불과"하기에 "지침에 따라 노임단가를 산정하지 않았거나 이를 기준으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어도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인국공 노동자들을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는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공공기관이 내부지침이나 행정규칙에 따라 계약을 맺거나 처분을 해 왔다면 자기구속을 받게 되므로 이를 위반하면 위법한 처분이 될 수 있다"며 반박했다.

노동자들은 재판 과정에서 인천국제공항공사가 '계약금액 조정의무를 저버렸다'는 점도 지적했다. 기획재정부는 2018년 3월 노임단가나 최저임금이 인상될 경우, 인건비에 한해 원청인 공공기관이 용역업체·자회사에 예산을 연동해 올려주도록 하는 국가계약법 시행령을 마련했다. 하청의 일방적 부담을 덜어, 노동자들이 적정임금을 받게 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법원은 '하청이 먼저 요청하지 않는 이상 원청이 올려줄 의무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계약상대방(용역업체)이 신청할 경우 그에 응해 조정할 의무가 있는 것일 뿐, 노임단가 변경만으로 자동적으로 조정할 의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시행령을 해석했다.

국가계약법 시행령 제64조 8항, 제66조 2항은 '중앙관서의 장 또는 계약담당공무원은 (중략) 계약금액을 조정한다'고 돼 있고, 어디에도 용역업체가 신청할 경우라는 조건은 없다.

법원은 또 용역업체는 국가기관이 아니므로 "조정을 신청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요컨대 임금 산정 기준이 되는 최저임금이나 시중 노임단가가 올라도, 원청이 알아서 먼저 올려줄 의무도 하청이 인상을 요청할 의무도 없다는 것이다.

최정규 변호사는 "용역업체 입장에서는 공공기관이 슈퍼 갑(甲)이라는 점, 업체가 (인건비 조정 요구 시) 다른 위탁사업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현실을 간과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중간착취 근절 의무화한 지침 내용은

법원이 사실상 '무용지물'로 판단한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은 공공부문에서의 용역근로자 처우개선, 중간착취 근절을 위해 2012년 마련됐다. 기획재정부·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고용노동부 3개 부처 합동으로 만든 가이드라인이다. 공기업·지방자치단체 등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청소 △경비 △시설물 관리 △생활폐기물 수집·운반 업무 4개 부문 용역근로자들이 적용 대상이다.

지침의 주요 내용은 우선 원청이 용역의 예정가격을 계산할 때 시중노임단가(최저임금보다 더 높게 책정되는 평균임금)를 적용하게 하는 것이다.

이후 용역업체를 선정할 때 ‘근로조건 보호 관련 확약서’를 제출했는지를 확인해, 적격 여부를 따진다. 이 확약서에는 △예정가격 산정 시 적용한 노임(시중노임단가 등)에 낙찰률(현행 87.995% 이상)을 곱한 수준 이상으로 임금 지급 △퇴직급여·4대 사회보험료 등 법정부담금 지급 △포괄적인 재하청 금지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남녀고용평등법 준수 등이 포함된다.

용역계약 체결 단계에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용을 승계하고, 용역계약 기간 중 고용을 유지한다'는 등의 내용을 계약서에 명시한다. 용역업체가 '확약서'에 적은 내용을 준수하도록, '(하청이) 확약서를 위반할 시 계약 해지 및 향후 입찰 참가 자격 제한이 가능하다'는 내용도 담긴다.

원청인 공공기관은 용역업체가 확약서 내용을 지키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하도록 지침에 명시하고 있다. 시중노임단가에 낙찰률을 곱한 수준 이상으로 임금을 주고 있는지, 퇴직금 등은 제대로 줬는지, 원칙적 고용승계는 잘 지켜지고 있는지 등을 관리·감독할 의무도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 "이럴 거면 지침은 왜 있나"

공공운수노조는 13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공부문 용역·위탁 간접고용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정부 지침을 위반하는 사업장이 전국적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무비를 떼이고 고용불안에 시달려 문을 두드려도 고용노동부는 묵묵부답”이라며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 등은 왜 만들었는가”라고 규탄했다. 공공운수노조 제공

공공운수노조는 13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공부문 용역·위탁 간접고용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정부 지침을 위반하는 사업장이 전국적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무비를 떼이고 고용불안에 시달려 문을 두드려도 고용노동부는 묵묵부답”이라며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 등은 왜 만들었는가”라고 규탄했다. 공공운수노조 제공

그러나 이 같은 지침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 현장 노동자들은 아우성이다. 노동자들이 오래도록 공문을 보내며 항의하고, 감사원에 진정을 넣고, 시위를 하며 ‘소란’을 피워야 뒤늦게 바로잡힐까 말까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수원의 경우 감사원 판단이 나온 2018년 이후 계약부터 시중노임단가가 적용된 임금을 받고 있다고 한다. 김성기 위원장은 "감사 청구와 소송 덕분에, 우리 단순노무직 말고 원자력발전소 내 경상정비 같은 기술직들에게도 (임금을) 감액하던 관행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인국공도 소송을 낸 이후인 2020년 7월 자회사 소속으로 전환되면서 시중노임단가를 적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늦게 바로잡혔을 뿐, 소송에서 지면서 '덜 받은 임금'을 받을 방법은 사실상 사라진 셈이다.

공공부문의 보호지침 위반 폭로는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는 지난 13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 등은 왜 만들었는가"라며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조에 따르면 △경산시 생활폐기물 수집·운반 △청주시 생활폐기물 수집·운반 등 사업장에서 정부 지침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일부 노동자를 계약직으로 고용해 지침에 미달하는 급여를 주고 남은 돈을 착복하거나, 업체와 연관이 있는 일부 인원에 임금을 몰아주고 다른 직원들에겐 지침에 미달하는 급여를 주는 식의 중간간취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입법 시급, 국회 빨리 움직여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놓인 볼록거울에 국회 본청의 전경이 비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놓인 볼록거울에 국회 본청의 전경이 비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결국 국회에서 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 용역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중간착취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다.

현재 국회에는 공공기관뿐 아니라 민간까지 포괄해 간접고용 노동자의 처우개선과 중간착취를 방지하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다. 원청이 인건비로 책정한 금액은 온전히 노동자들에게 갈 수 있도록 ‘임금 전용계좌’를 도입하는 방안(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박대수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적이다.

우선 공공부문만이라도 처우개선을 확실히 하자는 법안도 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공부문이 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상대방(용역업체)이 고용한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계약서에 포함시키고 △해당 근로조건을 노동자에게 알리도록 하며(위반 시 과태로 500만 원) △용역업체가 근로조건을 어겨 근로자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3배 내로 배상책임을 지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는 20대 국회에서도 같은 법안을 발의했지만 무관심 속에서 자동폐기됐다.

지금 발의된 법안들도 국회 논의가 저조한 실정이라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고통이 길어지고 있다.

최나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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