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망상에서 추암까지 동해시 바다 여행
경남 남해군과 강원 동해시는 바다 이름을 행정 지명으로 쓴다. 동해시는 1980년 삼척 북평읍과 명주군(나중에 강릉과 통합) 묵호읍을 합쳐 만든 도시다. 면적도 강원도에서는 아주 작은 편이다. 북쪽 끝 망상해변에서 남쪽 끝 추암해변까지 거리가 약 20㎞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명처럼 동쪽 바다의 정수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동해 중의 동해, 그 옹골찬 풍경을 따라간다.
망망대해 망상해변, 일출 명소 어달해변
강릉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 옥계IC를 지나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망상해수욕장이다. 약 2㎞에 이르는 백사장으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망상(望祥)은 망령되고 헛된 생각이 아니라, 무언가 상서롭고 복된 일이 일어날 조짐을 의미한다. 동해시에서 최고의 해돋이 장소로 꼽히는 곳이다.
망상이라는 지명은 송강 정철(1536~1593)의 칠언절구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시절 정을 나누었던 삼척 관기 ‘소복’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지은 시라고 한다. 이미 다른 사람의 소실이 된 터라 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드넓은 해변과 망망대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은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을 끌어안기에 부족함이 없다.
망상해변을 자랑할 때 깨끗한 백사장과 함께 상투적으로 따라붙는 ‘울창한 송림’은 옛말이 되고 말았다. 해변에서 바다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나무 한 포기 없는 민둥산 능선이 애처롭다. 2019년 4월 강릉 옥계지역 대형 산불 때 망상해변의 송림도 불타고 말았다. 함께 피해를 봤던 망상오토캠핑리조트는 2년간의 복구를 거쳐 지난달 새로 문을 열었다. ‘오토캠핑’이라는 명칭 때문에 캠핑 시설로 오해하기 쉬운데, 실제는 7개 타입의 현대식 객실과 한옥마을로 구성된 가족 숙박시설이다.
망상해변에서 조금 내려오면 대진항과 어달해변으로 이어진다. 대진은 ‘큰 포구’라는 명칭과 달리 조그마한 어촌마을이다. 바로 아래 어달동도 마찬가지다. 바다에 바짝 붙은 마을로, 도로변에는 일출 전망을 자랑하는 숙소가 자리 잡았다.
망상해변이 바다와 백사장 외에 거칠 것 없는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라면, 어달해변 일출은 한결 생동감 넘치고 짜임새 있다. 수면 위로 투박한 갯바위가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고, 바다 가운데에 등대까지 있어 해돋이 풍경이 밋밋하지 않다. 갯바위에 부서진 파도가 200m 남짓한 아담한 해변으로 밀려들고, 어선과 갈매기까지 어우러져 어촌마을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논골, 질척거리던 산동네가 바다 전망대로
어달해변에서 모퉁이를 돌면 동해시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논골담길’이다. 바닷가 가파른 경사면에 형성된 달동네로, 언덕길을 오르면 묵호항과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1941년 개항한 묵호항은 석탄과 시멘트를 실어 나르는 동해안 제1의 항구로 성장했다. 전국 각지에서 온 화주와 선원들로 북적거려 지역에서는 ‘유행의 첨단도시’ ‘술과 바람의 도시’라 할 정도였다. 여기에 수산물까지 넘쳐나니 외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자연스레 언덕배기를 깎아서 마을이 형성됐다.
묵호항에 한 가득 부려 놓은 오징어와 명태는 바람이 잘 부는 언덕으로 옮겨 해풍에 말렸다. 그 과정에서 생선 씻은 물이 어머니의 고무대야와 아버지의 바지게에서 줄줄 흘러 좁은 골목길이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질척거렸다. 논 한 뙈기 없는 바닷가 언덕이 ‘논골’이 된 사연이다.
집집마다 생선을 널어 말리던 풍경은 사라지고, 지금 논골에는 러시아산 명태를 말리는 기업형 덕장이 몇 곳 남아 있을 뿐이다. 대신 볕 좋고 바람 잘 통하던 언덕 마을은 바다 전망이 좋다고 소문나면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급경사 좁은 땅을 다져서 계단식으로 지은 단층 집들은 서로의 경관을 방해하지 않는다. 일조권과 조망권 분쟁이 있을 리 없다. 터가 좁으니 앞집과 뒷집, 옆집 사이 좁은 통로는 자연스럽게 담장 없는 골목길이 됐다. 그 골목 담벼락을 힘겨웠지만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는 그림으로 장식한 게 지금의 논골담길이다. 논골 주민들의 애환이 담긴, 옛 추억으로 안내하는 길이다.
1963년 불을 밝힌 묵호등대는 논골마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논골담길은 이 등대에서 등대오름길, 논골1·2·3길로 분리돼 묵호시장과 묵호항 등 바닷가로 연결된다. 등대 앞 좁은 광장에 1968년 개봉한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시나리오에 최적화된 장소를 물색하는 ‘로케이션 매니저’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이곳 풍광이 당시에도 예사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락을 이룬 전망 좋은 집들은 하나둘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하고 있다. 새집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옛집을 개조해 옹기종기 정겨운 마을 분위기는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
논골마을과 북측 언덕은 가파른 골짜기로 분리돼 있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도째비골’이라 불렀다. 날이 저물면 도깨비라도 나타날 듯 계곡의 분위기가 음산해서 붙인 이름이다. 요즘처럼 밤이 밝지 않던 시절, 외딴집의 30촉 백열등이나 먼 바다에서 깜빡이는 어선의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보이기도 했을 듯하다.
좁고 음습한 이 골짜기가 최근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입장료 성인 2,000원)라는 놀이터로 변했다. 전망대인 하늘산책로(스카이워크)와 스카이사이클(공중 자전거), 자이언트슬라이드(대형 미끄럼틀)가 설치돼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스카이워크에서 내려다보면 도깨비방망이 모양의 해상 산책로(해랑전망대)도 있다.
아찔한 전망과 색다른 재미도 좋지만, 자칫 논골담길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논골담길이 주목을 끈 건 바다 전망이 빼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 낸 이들의 체취와 애환이 서린 삶터라는 이유가 더 크다. 더 이상 유행 타는 시설에 욕심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감춰진 산책로 ‘행복한섬길’, 물 위를 걷듯 추암 촛대바위
묵호에서 북평 쪽으로 내려오면 동해선 철길과 바로 붙어 있는 한섬해변이 있다. 외지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는 숨겨진 해변이다. 해변 아래쪽 바닷가 언덕에 감추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다. 특별히 해변이랄 것도 없는 손바닥만 한 모래사장을 끼고 있다. 갯바위에 밀려드는 파도 소리만 정적을 깨는 아담한 사찰이다.
한섬은 천곡동굴에서 발원한 차가운 지하수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실제는 섬이 아니라 바다로 살짝 튀어나온 지형이다. 한섬해변 북측에서 해안을 따라 약 1.5㎞ 이어지는 산책로는 ‘행복한섬길’이라 부른다. 호젓하게 바다 풍광을 즐길 수 있는 ‘행복한 섬 길’이기도 하고, 해안에 흩어진 기암괴석을 감상하며 걷는 ‘행복 한 섬 길’이기도 하다. 소나무가 울창한 길을 따라가면 매바위 얼굴바위 호랑이바위 등으로 이름 붙인 온갖 형상의 바위가 줄줄이 이어진다. 건너편으로 멀리 논골마을이 보이고, 기암괴석에 파도가 들이치는 동해의 감춰진 해변이다.
동해 가장 아래쪽 바다는 삼척과 경계를 이루는 추암해변이다. 해변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다. 양쪽에 바다로 살짝 튀어나온 언덕이 감싸고 있어 둥그스름한 모양만큼이나 포근하다. 해변 북측의 촛대바위는 일출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촛대바위가 가장 잘 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최근 ‘능파대’라는 전각을 세웠다. 김홍도가 그린 ‘금강사군첩’ 중에서 촛대바위 일대를 묘사한 그림에서 따왔다.
능파(凌波)는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미인의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이르는 말이다. 뾰족하게 곧추선 촛대바위만 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바로 옆 바위 군상까지 둘러보면 수긍이 간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에 깎인 바위가 숲을 이루고 있다. 거북바위, 부부바위, 형제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 등 온갖 기암괴석이 몰려 있어 ‘한국의 석림(石林)’으로 부른다. 푸른 바닷물이 바위 숲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모습은 조금 떨어진 출렁다리에서 더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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