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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가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가 알지니

입력
2022.01.03 19:00
수정
2022.01.03 21:23
25면
0 0
박성진
박성진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모두루(牟頭婁) 묘지명

모두루(牟頭婁) 묘지명

광개토태왕 비문은 유명하지만, 태왕의 신하였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명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1935년 중국 길림성에서 발견되었는데 아쉽게도 훼손이 심하여 800자 중 판독 가능한 글자는 250여자 정도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모두루의 선조는 북부여(北扶餘)에서 추모성왕(鄒牟聖王), 즉 주몽과 함께 고구려로 왔다. 모두루 본인은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바로 광개토태왕 때 조상의 땅인 북부여 관리자로 파견되었다. 임지에서 태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슬퍼했다는 내용도 있기에 묘의 조성 연대는 장수왕 시대로 본다.

문장에서 고구려 임금을 성왕(聖王)으로 부른 것과 모두루가 자신을 노객(奴客), 즉 종으로 자처했다는 것이 이채롭다. 만주족도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노재(奴才)라고 하는 습관이 있어서 눈길이 갔다.

여러 학자가 비문을 판독했는데 그중 최남선 선생이 판독한 원문의 머리말을 옮겨 본다. "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聖王元出北夫餘, 天下四方知此國鄕最聖…", 풀어보자면 "하백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은 본래 북부여에서 나셨다.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 사방이 알지니…"

중국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던 조선 지배층은 결코 할 수 없던 장쾌한 말씀이다. 우리 옛글을 읽으면서 이런 호방함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내 나라 내 고향이 가장 성스럽고 세상이 다 아는 일이라고 선포하는 조상이 있었다니 뭉클하기까지 하다. 이런 자부심이 없다면 어찌 사나운 외세로부터 그 오랫동안 나라를 지켰겠는가. 패기란 이런 것 아니겠는가!

돌아보니, 학창시절 북부여는 들은 적도 없고 부여도 그저 한두 줄, 우리와 가까운 어떤 부족국가 정도로 넘어갔다. 근자에 '조선사 편수회 사업개요'라는 책을 볼 수 있었는데, '단군'과 '부여' 지우기도 총독부의 업무였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역사를 배웠는가.

박지원 선생이 '열하일기'에서 말씀하셨다.

"아! 후세에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이 한사군(漢四郡)의 땅을 압록강 안쪽에 펼쳐놓고 억지로 사실로 엮어 구차하게 배분하고는, 그 안에서 패수(浿水)가 어디인지 찾으려 하였다. 압록강을 패수라고 말하기도 하고, 청천강을 패수라 말하기도 하며, 대동강을 가리켜 말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조선은 옛 땅을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축소시켰다. 한나라 이래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는 일정치 않았고, 우리 선비들은 지금의 평양만을 기준으로 삼아 떠들썩하게 패수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중국 사람들은 요동의 왼쪽 물을 통틀어 패수라고 하니 그 거리가 맞지 않고 사실과 많이 어긋나는 까닭은 여기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터를 알려면 먼저 여진 땅을 우리 국경 안으로 합치고 그다음에 요동에서 패수를 찾아야 한다. 패수가 어디인지 정해진 뒤라야 강역이 분명해지고, 그런 뒤라야 고금의 사실들이 부합될 것이다. 평양이 원래 요동에 있었는데 패수와 함께 그 이름이 이곳저곳 들쭉날쭉 옮겨진 것이다."

현재 우리는 패수가 어디라고 배우는가, 누구의 말이 실려있는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사대도 모자라 식민사관이 활개를 친다. 광복 후 암류하던 식민사관은 '실증'이라는 허울을 쓰고 관학(官學) 연대로 더 강력해졌다. 과대망상과 허구로 고대사를 왜곡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논리로 가야사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그 증거이다.

조선이 옛 땅을 싸우지도 않고 축소시킨 것처럼 남원과 합천을 일본 땅으로 인정하는 일을 벌여선 안 된다. 모두루의 묘지명을 다시 보라. 조상 땅을 팔아서 얻을 영예는 없다. 이벤트와 실적에 목매는 행정 부처의 폐습 또한 시민들이 바로잡을 차례다.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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