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예술가 꿈 포기 안 한 가출청소년, 러시아 '구축주의' 아버지로

입력
2021.12.28 04:30
22면
0 0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展’ 특집 <11>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선원(1911년 작)', 국립 러시아 미술관 제공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선원(1911년 작)', 국립 러시아 미술관 제공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어머니는 그가 5세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와의 갈등을 견디다 못해 14세 나이에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다. 선원, 하역꾼, 성상화가의 조수, 거리음악가, 레슬링 선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예술가의 꿈을 놓지 않았던 그는 현재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거장이자 20세기 디자인과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구축주의(구성주의)의 아버지로서 여겨진다.

1899년 집을 나온 어린 타틀린은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 오데사로 향했다. 거리를 떠돌던 그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고 세상 구경도 할 수 있는 선원이 되기로 했다. 비록 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수습 선원에 불과했지만, 어린 타틀린이 흑해를 누비며 겪은 경험은 이후 그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터키에서 접한 다양하고도 화려한 이국적 색채는 원래 그림 그리기 좋아했던 그가 미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됐다.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모서리 역부조(1914년 작)'. 국립 러시아 미술관 제공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모서리 역부조(1914년 작)'. 국립 러시아 미술관 제공

1902년 타틀린은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자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기에 학업에 매진할 수 없어 결국 그는 성적 부진으로 이듬해 제적당했다. 이에 타틀린은 해상무역학교에 입학해 다시 수습 선원으로 일하며 미술가로서 수업을 받기 위한 저축을 시작한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그는 학비가 저렴하면서도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펜자 미술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 간다. 그러나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식 미술교육은 당시 서구와 러시아의 미술계가 진행하고 있던 여러 실험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타틀린은 기회가 되는 대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여러 화실과 전시를 무작정 찾아다니며 새로운 경향을 스스로 익혀 나간다. 정규 교육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스스로 공부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을 흡수해 나가는 타틀린의 학습방식은 그가 아방가르드 미술가로서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프로젝트 스케치(1920년 작)'. tehne.com 제공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프로젝트 스케치(1920년 작)'. tehne.com 제공

1910년대 중반 타틀린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계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했으나 가난은 여전히 그를 지겹도록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서커스장의 구경거리용 레슬링 선수로 일한 적도 있었는데 키는 컸지만 비쩍 말라 힘을 쓰지 못해 심하게 얻어맞기 일쑤였으며 그 때문에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됐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한때 거리음악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타틀린은 1914년 초 베를린에서 열린 러시아 민속전에 음악가로 참가해 번 돈으로 기차표를 구매해 파리로 떠났다. 목적지는 그가 평소 동경하던 피카소의 작업실이었다. 타틀린은 아무런 확신도 약속도 없이 무작정 피카소를 찾아가 자신을 조수로 써 주기를 간청했으나 이미 피카소에게는 이 같은 부탁을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고 있던 탓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타틀린은 매일같이 피카소의 작업실을 방문해 그를 설득했으나 결국 수중의 돈이 떨어져 모스크바로 돌아가야만 했다.

당사자들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이 짧은 조우는 이후 전 세계의 미술과 건축, 디자인의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피카소는 평면 회화를 벗어나 여러 재료를 이어 붙이는 기법인 아상블라주를 통해 입체주의 원칙을 공간과 물질에 적용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를 눈여겨본 타틀린은 모스크바로 돌아오자마자 나무토막, 철판, 철사, 밧줄 등 여러 재료를 조합한 '회화적 부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영향으로 시작된 이러한 작업은 '모서리 역부조'처럼 물질성과 함께 공간적 특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화했으며, 이후 혁명 기념비로서의 상징적 조형성과 실용성을 조합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프로젝트를 통해 그 잠재력을 꽃피우게 된다.


1920년 타틀린과 제자들이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모형 앞에 서 있다. alyoshin.ru 제공

1920년 타틀린과 제자들이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 모형 앞에 서 있다. alyoshin.ru 제공

물질적 현실에 기반한 타틀린의 예술은 이후 미술을 통한 실제적 현실을 창조하려는 흐름인 구축주의 형성의 토대가 됐다. 구축주의는 사변적 순수미술이 아닌 인간의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생산적 미술을 지향했으며, 이는 합리성과 간결함을 중시하는 1920년대 이후 현대적 산업디자인과 건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는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현대적 물질문화의 시각적 기반이 됐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예술가로서의 꿈을 놓지 않은 한 가출청소년의 도전과 의지가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훈석 전시기획자·러시아미술사 박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