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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주가 잠적하면 체불임금 받을 방법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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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주가 잠적하면 체불임금 받을 방법이 없어요"

입력
2021.12.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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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구제 못 하는 임금체불 진정제도]
체불확인서 받아야 대지급·소송 가능
대표 조사 없이는 확인서 발급 어려워
출석 강제 어렵고 잠적해도 처벌 못 해
"근로감독관 강제조사권 부여 등 보완을"

노동관련 단체 대표들이 올해 9월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임금 체불 근절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노동관련 단체 대표들이 올해 9월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임금 체불 근절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대구 건설현장에서 경리로 일했던 김모(24)씨는 임금 270만 원을 받지 못해 지난달 초 고용노동부에 임금체불 진정서를 접수했다. 하지만 두 달이 다 된 지금도 진정 절차는 제자리걸음이다. 김씨가 밀린 임금을 받으려면 근로감독관에게 '체불임금 등 사업주 확인서'(체불확인서)를 발급받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사업주 조사가 필요하지만, 회사 대표가 담당 근로감독관의 연락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지 못한 근로자를 위해 체불임금 진정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사업주의 조사 회피로 제도가 무력화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사업주가 근로감독관의 출석조사 요구에 불응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데다, 시간을 끌면 3년으로 한정된 임금채권 소멸시효를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선 저임금 비정규직 근로자가 이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면서, 근로감독관에게 강제조사권을 부여하는 등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체불 사업주, 조사 불응해도 제재 없어

28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현행 임금체불 진정제도상 노동자가 밀린 임금을 받으려면 체불확인서가 꼭 필요하다. 확인서가 있어야 대지급금(정부가 체불임금을 대신 지급한 뒤 사업주에게 구상권 행사)을 받을 수 있고, 회사 대표를 상대로 민사소송이나 채권추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불확인서는 관할지역 지방고용노동청에 근무하는 근로감독관이 발급한다. 이 과정에서 사업주 조사는 사실상 필수 절차다. 근로감독관이 사용자와 근로자 의견을 모두 들어본 뒤 체불임금액을 확정하겠다는 취지다. 고용부 관계자는 "대표가 반드시 출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연락은 닿아야 한다"며 "갈등 요소가 있는 사안인 만큼 양측 의견을 두루 청취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문제는 대표가 의도적으로 조사를 피하는 경우다. 진정 단계에서 이들의 출석을 강제할 권한이 근로감독관에게 없다 보니 이를 악용하는 체불 사업주가 적지 않다는 게 현장 얘기다. 최미숙 노무사는 "사업주가 출석을 미루거나 연락을 끊은 채 시간을 끄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조사 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업주가 잠적할 경우 근로감독관은 '근로자 주장'이라는 단서를 달아서 체불확인서를 발급할 수 있지만 실제 이런 재량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노무법인 해닮의 이동직 노무사는 "간혹 확인서에 근로자 주장이라고 명시하고 발급해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추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어 근로감독관들이 꺼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만 전전긍긍… "근로감독관 역할 확대 필요"

사용자의 무책임한 행태를 제지할 방도가 없으니, 피해는 고스란히 근로자 몫이다. 숙박업소에서 일하다가 석 달치 월급 400만 원(이자 포함)을 떼인 조모(36)씨는 체불확인서를 받느라 또 3개월을 허비해야 했다. 조씨는 "올해 1월 진정을 넣었지만 대표가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4월에야 출석했다"며 "임금도 아니고 확인서를 받는 데에만 이렇게 오래 걸리니 정신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조씨는 이후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한 민사소송을 진행했는데, 대표가 이번엔 소장을 받지 않는 통에 지난달에야 승소 판결을 받았다.

더구나 근로자는 임금채권 소멸시효에 따라 3년 안에 체불임금을 받아내야 한다.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시효가 멈추지만, 확인서 없이는 이조차 불가능하다. 체불 직후 진정하지 않은 경우라면 피해가 더 심각하다. 2018년 8월부터 14개월간 식당에서 일한 급여를 못 받은 이모(26)씨는 올해 8월 진정을 냈다가 임금 상당액을 보전받기 어렵게 됐다. 업주의 출석 지연으로 진정 절차가 이달 중순에야 마무리됐는데, 그 사이 3년 전 밀린 일당이 차례로 소멸시효를 맞은 것. 이씨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받을 수 있는 돈이 줄어들면서 원래 받지 못한 임금보다 100만 원가량 적은 250만 원만 체불액으로 확정됐다"며 "대표가 출석을 미룰 때 진작 문제 삼지 않은 걸 후회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임금체불 진정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사업자가 신속히 응하도록 강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현실적 대안으로 노동 분야 특별사법경찰로서 근로감독관의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최미숙 노무사는 "사업주의 고의적 출석 회피로 근로자가 피해를 보는 경우, 근로감독관이 강제조사와 같은 상응 조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근로감독관의 인력 충원, 교육 확대 등의 방안도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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