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 파일럿 김연경 부기장
"한창 일할 연차에 코로나로 너무 많이 쉬어"
"코로나 이전처럼 월 70~80시간 일하고 파"
과학고·카이스트 출신, 수학자 꿈꾸다
뒤늦게 진로 바꿔 미국 비행학교 유학
2016년 23세에 입사...사내 최연소 파일럿
"종이·펜만으로 평생 행복할까 고민 끝 결정"
"파일럿으로 근무하면서도 사이판을 11월에 처음 가봤어요. 그런데도 출국심사 후 공항 밖으로 1분 정도 잠깐 나가 바깥 바람 쐬고 바로 비행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서 굉장히 아쉬웠어요. 그 이후 또 휴직하게 돼 사이판행 항공편이 마지막 비행이 됐네요. 호랑이 새해에는 상황이 좀 나아지겠죠?!
임인년(壬寅年) 새해에 입사 7년차가 된 제주항공 부기장 김연경(29)씨는 두 달 전 사이판으로 비행을 다녀온 기억을 아직 잊지 못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주로 국제 화물 운송이나 국내선을 조종하다, 승객 약 170명(정원 189명)을 태워 거의 꽉 찬 국제선을 비행한 것은 1년여 만일 정도로 매우 오랜만이어서다. 확진자 급증으로 방역이 강화된 현재와 달리 당시만 해도 '위드 코로나' 정책이 시작되면서 외국 여행이 막 풀리는 분위기 덕분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내내 쉬었다. 회사 방침에 따라 11월 중순부터 12월말까지 한달 반가량 휴직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항공·관광업계 등은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 지원을 받으며 유휴 직원들이 교대로 휴직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김씨도 코로나19 확산 첫해인 2020년 8개월, 지난해 4개월 정도 쉬었다고 한다. 김씨는 "코로나19 이전에 바쁠 땐 한 달에 80~90시간 근무하다 코로나19 이후에는 20~30시간만 근무하니까 '힘들게 비행하며 산다'고 불평했던 그때가 소중하고 그립다"며 "새해에는 더 이상 휴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코로나19 걱정 속에 2년을 보낸 뒤 '호랑이' 새해를 맞이하며 '일상 회복'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겠지만,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한 이들은 아마도 직격탄을 맞은 업종일 터. 한때 카이스트(KAIST)에서 수학자를 꿈꾸다 뒤늦게 파일럿이 된 김씨도 마찬가지다. 다시 확진자가 급증하고, 오미크론 변이도 나타난 지금으로서는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기약이 없는 상황. 사내 최연소 파일럿으로 입사해 한창 일할 연차인데도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처지인 그의 새해 소망이 담긴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해 여행객 태운 국제선은 '사이판' 딱 한 번"
-지난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사이판 비행은 어땠나요?
"면세품을 들고 타는 승객들을 맞이하니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구나' 생각했죠. 저도 해외여행을 못 간 지 2년 정도 돼, 일로 갔지만 들뜬 승객들 심정과 다를 바 없었어요. 승객들 따라 정말 호텔로 가고 싶었어요. 미세먼지 없는 맑고 높은 하늘을 보니까 딱 '휴양지'라고 느껴졌지만, 공항 밖 사이판 땅을 밟은 건 정말 잠깐뿐이었어요. 모처럼 일로 외국에 나갔다 느낀 '여행의 설렘'을 만끽할 수 없는 현실이 아쉬웠어요.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코로나19로 다른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기도 곤란해) 제가 나온 사진은 없네요."
-코로나19가 많은 걸 바꿨네요.
"출근하면 전광판에 안내되는 입출국 항공편 수가 확 줄다가 어느 순간 국제선이 아예 사라졌어요. 회사 운항편도 3분의 1 수준으로 줄면서, 재작년부터 조종사와 객실승무원 모두 (한두 달씩 근무와 휴직을 교대로 반복하는) 순환휴직에 들어갔죠. 저는 10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근무했어요. 그때는 제주 부산 대구 등 주로 국내선을 운항했고, 여행객을 태운 국제선은 사이판이 유일무이했어요. 안전상의 이유 등으로 사이판으로 갈 때 조종했던 비행기를 타고 당일 바로 돌아와야 하는 '당일치기' 비행도 했고요. 하루 연속 근무시간 제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또 조종할 수는 없어, 한국행편을 조종할 기장과 부기장이 사이판 갈 때부터 동승한 것도 새로운 풍경이네요. 11월 16일부터는 다시 휴직 중이고, 1월 1일부터 근무해요."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나요?
"정부 지원금을 받지만 통상 월급보다는 적어 많은 분들이 어려움을 겪어요. 지난해 10월부터는 무급이고요. '놀면서 월급받지 않냐'는 친구들도 있는데, 일하는 게 좋죠. 개인적으로 이 일을 좋아하기도 하고, 일할 수 있으면서 휴가 가는 것과 자의가 아닌 타의로 강제 휴가 갖는 것은 다르잖아요. 너무 오래 쉬기도 했고요."
-쉬는 동안 어떻게 보냈나요?
"평소 관심있었던 '수상조종면허'를 따고, 꾸준히 운동도 했어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힘들어 마음고생도 했어요."
수학자 꿈꾸던 카이스트 졸업생, 파일럿으로
김씨가 하루 빨리 일상을 되찾고 싶은 이유는 코로나19로 인한 파장이 가장 크지만, 뒤늦게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 그 꿈을 이뤄 직업이 더없이 소중해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이라고 힘줘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학창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고, 남다른 실력을 보였던 그는 과학고를 조기 졸업한 뒤 카이스트(KAIST)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전공을 살려 수학자를 꿈꾸다 진로를 바꿨다.
-왜 진로를 바꿨나요?
"제가 활동적인 성격이에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가족과 동남아 유럽 등도 여행했고요. 대학교 3학년 때 '책상에서 종이와 펜만으로 행복해야 하는 일이 나와 맞을까' '내가 평생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해외 여행 다녀오다 탄 비행기에서 기장님 안내방송 듣고 '비행기에선 왜 항상 나이 지긋한 남성 기장 목소리만 듣는 걸까', '이 고정관념을 깨고 내가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어 알아보다 '활동적이고 여행을 좋아하는' 나와 맞을 것 같아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했죠."
-갑작스러운 결정에 부모님은 굉장히 당황했을 것 같은데요.
"반대예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명확히 말씀드린 것이 처음이어서 부모님은 오히려 '잘해보라'며 적극 지원해주셨어요. 덕분에 대학 졸업하자마자 바로 미국 비행학교에 유학갈 수 있었어요. 얼마 전 대학 동기 결혼식에서 만난 친구들은 파일럿이 된 저를 보고 매우 신기해했죠."
-굳이 왜 미국까지 갔나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파일럿이 되려면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나오거나 공군 조종사로 이력을 쌓는 두 가지가 일반 코스인데 저는 둘다 해당되지 않았죠. 학사 과정을 거의 마쳐 (다른 학교로) 편입도 어려웠고, 미국에 비행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국내 사설 경비행기 교육기관보다는 미국의 인프라가 더 좋기도 했고요. 항공기와 비행장이 많고, 날씨도 좋아요."
-실제로 해보니 잘 맞던가요? 어렵지는 않았나요?
"네. 먼저 자가용 조종사자격증을 딴 뒤 항공사가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사업용조종사 자격증도 취득해야 해요. 기간은 따로 정해지지 않았고, 경비행기를 최소 250시간 이상 타야 시험 응시자격을 줘요. 개인차가 있지만 보통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걸리는데, 저는 1년 만에 300시간 이상 조종하고, 시험도 다행히 한 번에 붙었어요. (웃음) 다만 혼자 1년 이상 타지 생활하는 게 조금 힘들었어요."
"이제 휴직은 그만, 일하면서 휴가 갈래요"
그는 교육을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치열한 경쟁은 물론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조종사 업계의 '유리천장'도 깨야 했다.
-취업난이 심한 데다 선망의 직업이라 취업이 어렵진 않았나요?
"응시 자격 중 최소 조종시간 기준이 회사마다 달라요. 1,000시간을 요구하는 곳도 있지만, 제가 지원할 수 있는 회사는 여러 곳 넣었죠. 제주항공은 300시간 이상이면 됐어요. 저비용항공사(LCC) 중에는 처음으로 지원했어요. 시험보러 가면 여성도 좀 있었지만 딱 봐도 다른 지원자와 열 살 안팎 차이 나서, 여성이라는 것보다는 나이 때문에 '어렵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으니까 해보고 안 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했죠. 필기시험, 가상으로 운항하는 시뮬레이터, 두 차례 면접 모두 잘 풀려 합격했어요."
김씨는 2016년 7월 스물셋의 나이에 입사했다. 비행 경력이 필요하고 남자는 군복무도 마쳐야 해 보통 30대, 빨라야 20대 후반인 것과 비교하면 젊은 편이라, 사내 부기장으로는 최연소 입사였다. 현재 제주항공에는 기장과 부기장이 각각 약 300명씩 총 600명 정도고, 그중 여성은 15명가량이다. 김씨보다 한참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지만, 지금도 사내 최연소 파일럿이다.
-면접시험 때 면접관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기특한 시선으로 봐주는 면접관도 있었어요. '입사하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분들과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는 취지의 질문이 나오기도 했는데,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오래돼 잘 기억 나지 않네요. (웃음)"
-실제로 일해보니 어떤가요?
"아버지 연배의 기장님과 일해보면 딸처럼 대해주셔서 편해요. (아직 짧은 역사의) 회사 특성상 젊은 기장님도 많고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제가 노력해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혹시 있을지 모르는) 편견도 없어질 거라 생각해요."
김씨는 지난해 다양한 분야 직장인들의 일상을 소개하는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실제 조종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의훈련장에서 기상악화, 기체흔들림, 위급환자 발생 등 돌발상황에 침착하게 대처하고, 김포~제주 무착륙 비행에서 깔끔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직접 기내 안내방송도 하며, '고정관념'도 깼다. 그 소감을 묻자 그는 오히려 "요즘 승객들은 음악 듣거나 영화 보려 이어폰을 끼고 있어 기내 방송에 귀기울이지는 않는다"며 무덤덤해하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파일럿 제복을 입고 공항에 들어서면 가끔씩 자신을 쳐다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설마 내 비행기에 탈까봐 불안해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괜히 걱정할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여자들은 자동차 운전을 잘 못한다', '남자보다 공간감각이 떨어진다'는 편견처럼 그런 시선이 걱정됐는데 방송 후 호의적인 반응을 보니 괜한 '기우'였다"며 안심했다.
"나는 우물 밖의 개구리"
-파일럿을 꿈꾸는 청소년이나 취업준비생에게 조언한다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파일럿의 화려한 모습이 주로 나오지만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도 있어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니까 잘 안 맞아 힘들어하는 분도 있고, 일정치 않은 수면과 식사 패턴에 고생하기도 해요. 또 조종사는 매년 '비행하기에 적합한지' 신체검사를 받아야 해 건강관리도 필수예요. 실제로 신체검사에서 적합하지 않다고 나와 몇 개월 쉬는 분도 목격했죠. 이처럼 자기관리가 중요한 점을 고려해 정말 내가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인지 고민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에게 '본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달라'고 요청하자 "우물 밖의 개구리"라는 답이 바로 나왔다. 그는 "평소 인생의 목표나 지향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서"라며 "앞으로도 새로운 것 두려워하지 말고, 여러 나라 여행도 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고 말했다.
복직을 앞두고 그는 건강관리에 더욱 신경 썼다. 백신 접종도 다 마쳤지만, 그 어느때보다 확진자가 크게 늘어나며 확산하고 있는 코로나19에 감염될 경우 자칫 근무 일정이 흐트러질 수 있어서다.
"하루 빨리 코로나가 괜찮아져 이전처럼 한 달에 70, 80시간씩 비행하고 싶어요. 일반인들이 (해외 여행 대신) 제주도 많이 가니까 '제주 운항 많지 않냐'는 분도 있는데, 국내선 아무리 늘어도 (국제선 비중이 커) 코로나 이전의 절반도 안 되거든요. 또, 저희는 비행시간 자체가 경력이라, 안전한 비행으로 사고 없이 경력을 쌓고 싶어요. 돈은 전혀 상관없고, 일하며 생산적인 삶을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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