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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나네, 다음에 오세요"… 성폭력 피해자 두 번 울리는 해바라기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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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나네, 다음에 오세요"… 성폭력 피해자 두 번 울리는 해바라기센터

입력
2021.12.27 13:13
수정
2021.12.27 13:22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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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채취 시급한데 37.5도 넘겼다고 돌려보내
센터 도움 못 받자 피해 신고 포기하는 경우도
"센터는 피해 지원 최일선… 적극적 방안 찾아야"

성폭력 피해지원기관인 해바라기센터가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들어 피해자의 즉각적인 증거 채취 요청을 거절하는 일이 잇따라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해바라기센터 출입문. 여성가족부 제공

성폭력 피해지원기관인 해바라기센터가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들어 피해자의 즉각적인 증거 채취 요청을 거절하는 일이 잇따라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해바라기센터 출입문. 여성가족부 제공

"코로나19 음성 결과지를 가져오거나 내일 다시 오세요."

미성년자 A(18)양은 이달 15일 성폭행 피해 신고를 위해 서울의 한 해바라기센터를 찾았다가 입구에서 가로막혔다. 체온이 37.5도로 측정됐다는 이유로 센터 측이 출입을 거부한 것이다. 피해 직후라 심신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A양은 "귀에 염증이 있어 체온이 높게 나왔을 수 있으니 한 번만 더 재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증거 채취가 어려울 수 있으니 씻지 말고 있다가 다시 오라"는 센터 직원 말까지 들은 뒤 A양은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발길을 돌렸다.

방역지침 이유로 당일 증거 채취 거절

해바라기센터가 입주한 서울 시내 병원 입구에 23일 안내문이 붙어 있다. 최주연 기자

해바라기센터가 입주한 서울 시내 병원 입구에 23일 안내문이 붙어 있다. 최주연 기자

코로나19 확산 이후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지원기관인 해바라기센터의 즉각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성폭행 사건은 피해자 몸에 남은 직접적 증거를 빠른 시간 내에 확보하는 게 피해 입증의 핵심 절차인데, 측정 체온이 정상 범주를 넘는다는 이유로 센터가 피해자를 돌려보내고 있는 탓이다. 체온이 37.5도를 넘으면 진단검사를 권고하는 정부 방역지침만 내세우며 피해자 지원 책임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A양은 이튿날 PCR 음성 결과를 받은 후에야 센터에서 피해 입증에 필요한 증거를 채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센터의 도움을 받기까지 끔찍한 시간을 홀로 견뎌야 했다. A양은 "(피해 직후)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이라 빨리 증거 채취를 한 뒤 씻어내고 싶었다"며 "지침상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들으니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A양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4월에도 성폭행 피해자가 서울권의 또 다른 해바라기센터를 찾았다가 코로나19와 무관한 고열 증세를 순간적으로 보여 센터 출입이 거절됐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는 "동행한 경찰관의 항의에도 센터 출입을 할 수 없었고, 피해자는 다음날 저녁까지 불안에 시달린 끝에 증거 채취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센터로부터 사실상 문전박대를 당하고는 피해 신고를 포기한 경우도 있다. 서울 지역 해바라기센터 관계자는 "고열 때문에 증거 채취를 미뤘는데, 피해자가 사건화를 포기했다"며 "다시 전화해서 설득했지만 쉽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원장은 "피해자가 사건 후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들이 해바라기센터나 응급실 관계자, 혹은 경찰"이라며 "이들의 대응에 따라 피해자의 사건화 의지가 갈리는데, 증거 채취나 출입을 단박에 거절당하는 경험은 피해자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준다"고 지적했다.

72시간 이내면 된다? 전문가들 "숫자일 뿐"

서울 시내 해바라기센터에 23일 성폭력 피해자 지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최주연 기자

서울 시내 해바라기센터에 23일 성폭력 피해자 지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최주연 기자

이런 사례가 잇따르자 해바라기센터가 방역수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느라 성폭력 피해지원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여성가족부와 시·도경찰청, 지자체, 의료기관이 협업해 운영하는 해바라기센터는 성폭력 사건 최일선에서 피해자에게 수사, 상담, 의료 지원을 원스톱으로 제공한다. 피해자가 내원하면 센터 근무 경찰이 1차적 사건 조사를 하고, 연계 병원의 응급실 종사자들이 피해자 몸에서 증거 채취를 하는 식이다.

센터와 경찰 측은 증거 채취 골든타임인 ‘72시간’만 지켜진다면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경찰 관계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72시간이 넘어갈 것 같다면 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증거를 채취할 수 있지만, 센터가 긴박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채취를 미룰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하반기 각 센터에 배포된 ‘코로나 대응 관련 안내’ 지침에도 내담자에게 코로나 의심 증상이 있으면 증거 채취를 미룰 수 있게끔 규정돼 있다.

그러나 성폭행 사건은 신속한 증거 채취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승덕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는 "72시간은 불가피하게 정한 데드라인일 뿐 숫자에 속아선 안 된다"라며 "손에 묻은 피부조직 등은 빨리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 최대한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김재련 변호사는 “항거 불능 상태를 입증하기 위한 음주 대사체의 경우 72시간 이내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수치가 현격히 내려간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성폭력 전문 변호사는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피해자에 따라선 범행 피해 직후 공황과 불안 상태로 인해 체온이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센터가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도 피해자를 도울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예컨대 피해자가 고열로 센터 출입이 불가할 경우 증거 채취가 가능한 다른 병동으로 이송하는 매뉴얼도 엄연히 마련돼 있는 만큼, 이런 대안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피해자 지원 과정에서 직면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대비해 병원에서 즉시 격리 가능한 병동을 파악할 수 있게끔 매뉴얼을 보충하겠다"고 밝혔다.

최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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