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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원 잡담 금지’에 대하여

입력
2021.12.2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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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일하는 한 청소노동자가 바닥을 닦고 있다. 원청과 청소 용역업체의 계약서에는 '잡담 금지' '콧노래 금지' 등의 조항이 포함되곤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에서 일하는 한 청소노동자가 바닥을 닦고 있다. 원청과 청소 용역업체의 계약서에는 '잡담 금지' '콧노래 금지' 등의 조항이 포함되곤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른 잔혹한 조항도 많은데, ‘잡담 금지’ ‘외부인 면담 금지’라는 대목에 더 눈이 갔다.

고용노동부가 올해 상반기 지방자치단체 용역 계약서를 분석한 내용을 보면, ‘청소원은 담당구역 화장실 상주’ ‘지시하면 시간·횟수 상관없이 재청소’ ‘파업하면 계약해지’와 같은 부당·위법 조항이 수두룩하다. 읽을수록 서럽지만 어쨌건 ‘업무’와는 관계가 있다.

그런데 ‘잡담 금지’ ‘외부인 면담 금지’는 청소 노동자가 바닥이 반짝일 정도로 일을 해낸다 해도 주변과 가벼운 대화나 가족이 찾아와 잠시 만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게 아닌가. 거칠게 해석하면, “그 꼴을 보기 싫다”가 된다.

‘잡담하기’란, 자신의 존재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긍정하는 행위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꼴을 보기 싫은 대상은 귀신같이 약자를 향한다. 만약 용역 계약 대상이 변호사, 의사, 혹은 기자였다면 ‘잡담 금지’ 조항은 들어있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이 현상은 낯설지 않다. 논란 끝에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을 사퇴한 노재승씨는 “가난하게 태어났는데 그걸 내세우는 사람이 정말 싫다” “검정고시 치른 걸 자랑하는 건 정상적으로 단계를 밟아간 사람들을 모욕한 것”이라 했다. ‘내세우는’ ‘자랑하는’이라고 표현했지만, 가난한 자가 가난하다고 말하고, 검정고시를 치른 사람이 검정고시를 치렀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꼴 보기 싫다는 거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나서지 말고 조용히 살아라”라는 반응이 흔하지 않나. 2014년 중앙대와 청소 용역업체와의 계약서가 공개된 적이 있는데, 심지어 ‘콧노래 금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약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걸 불쾌해하는 이유는 뭘까. 그저 ‘어디 감히?’라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본성 때문일까. 여기엔 두려움도 있다고 본다. 기득권을 움켜쥔 이들, 그리고 실제로는 약자이면서 강자 편에 포함되고 싶은 사람들은 약자가 스스로의 권리를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약자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하고 당당한 것, 이걸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진보와 변화의 힘은 여기에서 생겨나니까.

그래서인지, 약자 목소리 짓밟기는 흔하면서 교묘하다. 언론을 예로 들면, 일반 노동자들이 파업이나 시위를 하면 교통체증 위주의 기사가 많이 나온다. 뭐가 그렇게 취재하기가 싫은지, 파업·시위의 이유 몇 줄조차 넣지 않은 언론사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의사들이 파업이라도 하려고 치면 파업의 이유, 쟁점을 분석하는 기사들이 줄을 잇는다.

‘목소리의 균형’이 깨진 사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하고, 중요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유도한다. 한국의 상위 10%와 하위 50%의 소득격차(14배)가 프랑스(7배)의 두 배(세계불평등연구소 분석)라는 보도가 있었다. “서유럽만큼 부유하지만, 부의 불평등은 심각하다"는 결론. 그런데 동시대에 유력 대선후보는 ‘덜 받고도 일하려는 사람이 있으니 최저임금보다 더 적게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괴리가 아찔하다.

청소 노동자와 정규직이 함께 ‘잡담’을 나누는 사회라면, 상위 2%의 종합부동산세 쟁점이 연일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듯이 혜화역에서 시위를 하는 장애인들의 고충이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회라면, 그곳은 지금 이곳과는 얼마나 다른 곳일까.

이진희 어젠다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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