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당시 군수공장 등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와 유족들을 돕는 데 평생을 헌신해온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이 12일 별세했다. 향년 102세.
이 회장은 결혼 2년 만인 1942년 11월 남편이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군무원으로 남태평양으로 강제 징병됐다가 이듬해 11월 타라와섬에서 미군과 전투 중 숨지는 아픔을 겪었다. 고인은 1971년 박정희 정부가 대일민간청구권신고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자 피해자 유족 지원 활동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정부의 청구권 신고 홍보도 부족했고, 유족들이 문맹인 경우가 많았다. 이를 계기로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초대 회장을 맡았던 그는 이후 30여 년을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외길을 걸었다.
이 회장은 1991년 일제 강제 징병 피해자 등 35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1인당 2,000만 엔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내자 본격적인 일본 정부 사죄 촉구와 소송에 나섰다. 1992년 원고 1,273명이 참여한 광주 1,000인 소송을 시작으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소송, 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등이 원고로 참여한 관부재판 소송,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한 한일회담 문서공개 소송 등 7건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주도했다. 일본어가 유창한 이 회장은 80여 차례에 걸쳐 일본을 오가며 법정 증언을 했지만 결과는 모두 패소였다. 그러나 이 중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은 국내 손해배상청구소송의 밀거름이 됐다. 양금덕 할머니 등 일본 소송 원고들이 2012년 10월 광주지법에 소송을 제기해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이 회장은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한일회담 문서 공개 소송’에도 직접 원고로 나서는 등 ‘강제동원 특별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특히 2003년 12월 19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법사위 위원들에게 직접 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일제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 진상 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한 데 이어, 40년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한일회담' 문서를 공개했다. 고인은 일제 피해자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2012년 아들과 며느리가 세상을 뜨자 광주광역시에서 전남 순천으로 거처를 옮긴 뒤 한 요양병원에서 노년을 보내왔다. 이 회장 빈소는 광주 서구 천지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고인은 15일 발인식을 거쳐 전남 순천시립공원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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