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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과학은, 당신을 멈칫하게 만드는, 떨떠름한 과학이어야 한다

입력
2021.12.11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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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보편타당한 과학은 없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미국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상품, 백인과 타인종 등 경계를 넘나들고 교란시키는 여러 사물 혹은 유기체를 사이보그의 가족 혹은 동종이라고 부르면서, 이들이 오늘날의 실험실 생활방식을 목격하고 자신이 목격한 내용에 책임을 지면서 자신의 영향력 및 권력뿐 아니라 한계까지 인식하는 '겸손한 목격자'들이라고 말한다. 위키피디아 캡처

미국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상품, 백인과 타인종 등 경계를 넘나들고 교란시키는 여러 사물 혹은 유기체를 사이보그의 가족 혹은 동종이라고 부르면서, 이들이 오늘날의 실험실 생활방식을 목격하고 자신이 목격한 내용에 책임을 지면서 자신의 영향력 및 권력뿐 아니라 한계까지 인식하는 '겸손한 목격자'들이라고 말한다. 위키피디아 캡처


페미니즘 관련 글을 많이 쓰지만 주변에 페미니스트만 있지는 않다. 가족들, 초등학교 때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는 친구들, 대학 새내기 때 만난 단짝 친구들, 운동을 하며 만난 동호회 사람들 등 꽤나 다양한 정치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곁에 있다.

공개적으로 페미니즘 글을 쓰고 이를 적극적으로 SNS상에서 홍보한다는 점에서 처음 만난 사람도 손쉽게 나를 판단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이 어떤 종류의 불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들여다볼 틈 없이 손쉽게 재단당하는 삶도 살면서 한 번쯤은 나름대로 겪어볼 만하다.

글은 쓰지만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토론을 하지는 않는 편이다. 글로 자주 싸우니 일상에서까지 싸움을 끌고 오기가 피곤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는, 말과 글로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타인에 의해 살던 방식을 바꾸게 된다면, 그것은 글보다는 삶 그 자체가 엮이면서일 것이다.

어느 날 친구가 손을 떨며 실은 성소수자라고 커밍아웃을 한다거나, 행사를 열려는데 휠체어나 유모차가 접근할 수 있냐고 묻는 귀찮은 참여자가 생긴다거나,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먹지 않으니 채식 옵션을 달라고 말하는 회사 동료가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떨떠름한 애로 남으려고 애쓴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성폭력 혹은 차별이 일어날 때 '아 그 애가 맨날 하는 말이 있었는데' 하며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아마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자주 나를 향한 경멸을 느꼈을 것이다. 괜찮다. 나도 그랬으므로 쌤쌤이다.


문제적 과학기술의 출구는 어디인가

일상에서 어떤 균열을 만나 불편해질 때, 잘 쓰인 하나의 글보다도 그렇게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친구가 생길 때, 그래서 서로가 연루되어버릴 때, 고요하고도 결정적인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그쪽에 희망을 걸어본다. 어떤 상황이나 사람을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단번에 나누지 않고 잠시 판단을 유보한 상태로 지켜보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를 향한 경멸을 잠시 참아냄으로써 말이다.

과학과 페미니즘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젠더살롱'을 통해 대략 일 년간 과학 분야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글을 써왔다. 많은 경우 남성 중심적인 방식으로 발전해 온 과학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곧 서구, 백인,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객관성 및 합리성을 의심하고 이것이 누구의 지식이고, 누구를 배제해 왔는지를 되짚어 보는 작업이었다.

오랫동안 고민해보았다. 그렇다면 이 여정의 출구는 어디일까? 가장 보편타당한 지식을 생산한다고 믿었던 과학기술이 이토록 문제적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과학기술을 추구해야 하며, 어떻게 실행해 가야 한다는 말일까?

과학지식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기존의 과학지식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좀 더 생산적인 답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페미니스트로서 어떤 과학기술을 폐기하거나 거부하거나 비판자로서만 남기보다는 함께 들어가 참여하며 더 나은 지식을 생산하도록 돕는 쪽이고 싶다.

전문성 뒤에 숨었던 과학기술학의 '연루 선언'

2030 여성 우울증을 다룬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왼쪽)과 철새, 경락, 자폐증, 성형 과학기술학 현장연구 경험을 담은 책 '겸손한 목격자들'. 한국과학기술학회 제공

2030 여성 우울증을 다룬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왼쪽)과 철새, 경락, 자폐증, 성형 과학기술학 현장연구 경험을 담은 책 '겸손한 목격자들'. 한국과학기술학회 제공

지난 11월 27일 개최된 2021년 한국과학기술학회 후기학술대회는 이러한 논의를 발전시키기 매우 좋은 기회였다. 이번 학회는 '과학기술과 사회정의'를 주제로 삼아,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로 인해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과학기술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논의하는 장을 열고자 한다고 밝혔다. 곧, 학회를 통해 과학기술이 어떻게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취약자들의 치유와 돌봄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학회 라운드테이블에서 발표된 '연루 선언(Implication Manifesto): STS, 현장 연구와 (다시) 만나다'는 학회가 논의하고자 목표한다고 밝힌 바에 대한 답변으로 느껴졌다. '연루 선언'은 이삼십대 여성 우울증을 다룬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의 저자인 나와, 각각 철새, 경락, 자폐증, 성형의 과학기술학 현장 연구를 진행한 경험을 모은 책 '겸손한 목격자들'의 저자들과 함께 진행됐다.

우선 과학기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과학기술학은 '과학기술에 대한' 학문으로, 쉽게 말하자면 과학기술을 과학기술의 방법론이 아니라 인문사회학의 방법론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학기술학은 지금까지 인문사회학에서 과학기술이 자연과학, 공학, 의학 분야들의 전문영역으로 여겨지면서 과학기술의 구체적인 실행 내용은 피상적으로 다루어져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블랙박스'화된 과학, 블랙박스를 열어봐야 한다

브뤼노 라투르. 위키피디아 캡처

브뤼노 라투르. 위키피디아 캡처


대표적인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이 같은 현상을 과학기술의 '블랙박스화'라고 표현했다. 투입물과 산출물만 알고 블랙박스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다. 가령 인공지능(AI)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상에서 사용되고, 어떤 기술자에 의해서 이용이 통제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지 않고 AI가 가져올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식이다.

이 같은 상상에서는 AI 기술이 한 번 실현되면 마치 멈출 수 없이 퍼져나간다는 기술결정론적인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의 과학기술은 처음 탄생 초기의 모습대로 이론, 원리 등이 박제되어 보관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행위자들에 의해 그 모양을 바꿔 나가며 유통된다. 과학기술의 블랙박스를 열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서 개입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블랙박스화된 과학, '겸손한 목격자들' 저자에 따르면 '죽은 과학'에서 과학의 객관성은 과학자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획득된다. 곧 자신의 성별, 인종, 국적 등이 과학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삼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들은 쓴다. "과학자의 겸손함은 과학 지식이 인간과 비인간이 뒤섞인 이질적인 실행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완성된다. 겸손함이 약속하는 투명성이란 자신의 성별, 인종, 국적 등의 주관성이 아무런 표지(標識)를 남기지 않는 남성, 백인, 서구인에게나 허용되는 것이다. 그들의 겸손함은 그들의 몸과 다른 존재들 그리고 세계와의 연결을 지운다."


과학이, 연구자가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의 겸손함은 정확히 반대 방향의 전략을 취한다. (…) 현장연구를 하면서 우리의 몸은 다른 행위자들 그리고 현장과 연결되었고 우리는 그 연결을 최대한 드러내는 방식의 글쓰기를 택했다. (…) 겸손한 목격자는 이론과 개념으로 무장하고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곳곳에서 우리의 몸과 우리의 연구가 분리되지 않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자신이 생산하는 연구가 보편타당하다고 말하는 대신 자신의 연구가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를 먼저 밝히고, 연구자와 연구 대상이 이미 얽혀 있다고 말하는 '연루 선언'에 통쾌함을 느꼈다. 이들은 몸으로 엮어진 글을 통해서 "과학기술의 뒤도 앞도 아닌 옆"에 있겠다고 선언한다. 과학기술과 다양한 관계를 맺는 이들에게 과학기술의 본성과 실행을 서로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앎이란 앎의 과정이나 실행과 분리될 수 없고, 앎의 대상과 앎의 주체 역시 그 과정에서 서로 엮인다. 그것은 몸의 변화이기도 하다. 철새 연구를 쫓아다니다보면 길을 걷다가 이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새 소리를 구별할 줄 알게 되고, 자폐증 연구를 쫓아다니다보면 이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아동의 행동을 자폐스펙트럼의 증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우울증 연구를 쫓아다니다보니 위태롭게 우울 증상을 숨기고 있는 주변인이 이전보다 더 잘 보인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는 눈'이 생긴 것이다.

책 속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살아 있는 과학기술과 의료는 마치 살아 있는 인간이 그러하듯 선과 악, 순수와 타락, 숭고와 세속이 뒤섞인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모호함을 견뎌내는 일일지 모른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손전등을 상대에게 비춰 너는 과학인지 사이비 과학인지, 너는 페미니스트인지 안티페미니스트인지 묻기 전에 손전등을 내 쪽으로 돌려 먼저 밝히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연루된 존재였음을 말이다.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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