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존가' 배재영 재영 책수선 대표
"사람에게 인생 있듯 나는 '책생'을 보살피는 사람"
"책 수선, 옷 수선·구두 수선처럼 일상 되길"
사람은 아니지만 곁에서 늘 힘이 되는 존재, 그래서 그 존재의 삶을 보살펴 주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반려동물이 이런 존재라면 그에게는 책이 그렇다. 책 보존가인 배재영(35) 재영 책수선 대표는 ‘책생(冊生)’이라는 표현을 쓴다. 훼손된 책을 되살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책이 살아 온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고도 말한다.
최근 수선을 의뢰받은 책의 파손 모습과 의뢰인의 기억, 수선 과정 등을 담은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이라는 책을 펴낸 배 대표는 "모두 수선이 끝나 내 손을 떠난 의뢰인의 책이지만 나만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마음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재영 책수선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중고품 거래가 활발해지고 전자책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평생 소장하고 싶은 책을 가진 의뢰인이 꾸준히 있다는 것은 한낱 물건인 책에도 어떤 인생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배 대표는 8년째 책을 수선하고 있다. 순수미술과 그래픽 디자인 전공 후 2014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북아트와 제지(Papermaking)를 세부 전공으로 택했다. 졸업 후 미국 현지 책 보존 연구실에서 3년 6개월간 근무하며 1,800권 이상의 책을 고친 그는 2018년 2월부터 재영 책수선을 운영 중이다. 국내에선 낯선 책 보존 작업을 시작하면서 책 보존가 또는 지류 보존가라는 직업의 정식 명칭 대신 더 많은 가능성을 위해 수선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가 책 수선에 매료된 이유는 "낡고 망가진 책을 보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다. 책을 마음껏 해체하고 망가뜨릴 수 있는 일종의 면죄부를 얻은 기분도 들었다. "옛날에는 양장 제본 책등 안쪽에 이면지를 썼는데 책을 해체하다 보면 이 부분에서 신문이나 러브레터의 일부가 발견되기도 해요. 이런 엉뚱한 발견이 흥미로워요."
그래서 배 대표에게 책은 놀이동산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책마다 손상된 모습이 다 다른데 대부분 책 주인의 특정 습관 또는 놓인 환경에 따라 책이 망가지기 때문"이라며 "손상 이유를 유추하고 상상해 보는 재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스스로를 "책을 입체적으로 보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기만 하는 것과 달리 사물로서 책을 만지고 보는 시간이 많고, 책의 내용도 파악해야 수정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한국에서 만난 책 수선 의뢰자는 115명에 이른다. 평생 소장하고 싶은 책을 가진 의뢰인이 이렇게 많을 것으로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부터 써 오던 70년이 넘은 일기장,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성경책, 귀퉁이가 찢어진 한정판 잡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오랜만에 발견한 책이라며 연락해 오는 의뢰인도 많아 책 수선 의뢰는 이미 내년 5월까지 예약이 꽉 찬 상태다.
요즘은 인체에 무해한 약품도 많이 나왔지만 책 복원은 오래된 종이를 다루는 일인 만큼 많은 화학 지식이 필요하고, 급한 성격이 차분해졌을 정도로 기다림의 과정도 많은 일이다. 그가 지금 가장 기다리는 일은 책 수선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아직은 낯선 책 수선이 옷 수선, 구두 수선처럼 흔한 일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또 한번의 새로운 기회를 갖는 망가진 책과 헌책이 점점 더 많아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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