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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원은 화장실에 상주하라' 지자체의 깨알 같은 갑질 계약

입력
2021.12.15 04:30
수정
2021.12.15 09:07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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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착취의 지옥도, 그 후 ]
<21> 지자체의 '갑질 계약'
71%의 지자체가 황당한 갑질 조항 넣어
갑질 지자체 절반은 노무비 기준 안 지키고
중간착취 감시 의무 뒷전인 지자체도 상당


서울에서 일하는 한 청소노동자가 바닥을 닦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계약서에서 드러난 '갑질조항'들을 보면 용역업체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가 처한 현실이 참담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에서 일하는 한 청소노동자가 바닥을 닦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계약서에서 드러난 '갑질조항'들을 보면 용역업체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가 처한 현실이 참담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청소원은 중식시간을 제외하고 근무시간 내에는 담당구역 화장실에 상주하여야 한다."(경기 의왕시청)

"미화원은 언어와 행동에 세심한 주의를 하여야 하며, 타인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는 행위, 작업 중 잡담을 하는 행위 등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서울 양천구청)

"재청소를 명할 때에는 시간, 횟수에 관계없이 재청소를 실시하여야 한다." (대전 동구청)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화장실에만 있어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 한번 나눌 수 없으며(잡담 금지), 시키면 시간·횟수 제한 없이 재청소를 해야 한다는 글귀를 읽다보면 숨이 막힌다.

현재 지방자치단체들이 청소·경비 등 용역업체와 맺은 계약서와 부속 과업지시서에 넣은 내용들이다.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노동부를 통해 확보한 ‘2021년 상반기 공공부문 용역 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 실태조사 결과' 자료에는 기가 막힌 지자체의 갑질조항들이 담겨 있다.

고용부는 올해 상반기 34개 지자체가 용역업체와 맺은 계약서를 점검해 24개(71%) 지자체의 계약서에서 부당·불공정 조항을 찾아내 개선을 권고했다. 계약 건수로 따지면 총 88개 용역계약 중 54건(61%)에서 갑질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일보 확인 결과 대다수 지자체는 이런 조항을 수정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세심함은 갑질하는 데만 주로 쓰인다. 용역업체 소속 간접고용 노동자 임금은 기준(시중노임단가)보다 낮게 지급하고, 용역업체들의 임금 중간착취 여부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

헌법 부정하는 갑질 조항 버젓이

정부가 2012년 만든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에서 금하고 있는 계약서상 부당·불공정 조항은 크게 4가지이다. 지침을 만든 지 10년이 됐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 침해까지 버젓이 담은 계약서들이 즐비하다.

(1) 용역업체의 경영·인사권 침(지자체가 용역근로자 징계, 해고 등에 관여하는 것 등) : "발주자가 종업원 중 부적합하다고 인정해 교체를 요구할 시에는 이에 응하여야 한다. 종업원을 채용 및 변경하고자 할 때는 사전에 발주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울산 울주군청)

(2) 부당한 업무지시(지자체의 요구로 추가 업무를 하게 하는 것 등) : "용역업체의 보유 장비에 대하여 구청의 요청이 있으면 구청 또는 구청이 지정하는 자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여야 한다"(Y구청, 현재 수정함), “과업지시서에 기재되지 않은 사항일지라도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지시하는 사항은 이행하여야 한다"(경기 하남시청)

(3) 노동3권 제약(정당한 노조활동을 금지하는 것 등) : “노사 분규로 인해 청소용역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을 때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갑에게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용역업체는) 이를 배상해야 한다” (서울 구로구청), "도급업체의 노사 분규 등 사정으로 용역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에는 발주처 임의로 계약 해지하고 도급자는 모든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충남 서산시청)

(4) 과도한 복무규율(지자체가 부당하게 복무를 직접 규율하는 것 등) : "청소원은 작업 도중 잡담이나 고성을 삼가야 며 지정장소 이외에서의 휴식 및 외부인과의 면담을 일절 삼가도록 하여야 한다"(울주군청) "업무수행 시 일절 잡담을 금하며 지정된 휴게장소 이외의 장소에서 휴게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강원 양양군청) "공중화장실 청소 등을 요청하는 민원의 신고 및 발주기관의 지시가 있을 경우에 30분 이내 담당구역 도착 후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의왕시청)

이외 기타 항목으로 "이 계약의 각 조항에 해석상 의문이 있을 때에는 발주기관과 계약상대자 상호 합의에 의하여 정하고 합의가 되지 아니할 때에는 계약상대자는 발주기관이 해석하는 바에 따른다"(대전 대덕구청), "종합사회복지관 측의 요구가 있을 경우 각종 집기, 비품의 운반 및 제설작업 등에 협조하여야 하며, 이를 이유로 반대급부를 요구할 수 없다"(서산시청) 등의 조항도 있었다.


지자체 3분의 1만 수정

정부가 전국 기초지자체 226개(광역지자체 포함 243개) 중 34개만 점검했는데도, 24개 지자체가 맺은 총 54건의 계약에서 140개의 부당·불공정 조항이 발견됐다. 부당한 업무지시가 50개 조항으로 가장 많았고, 경영·인사권 침해(47개 조항), 노동3권 제약(27개 조항) 등이었다.

이런 조항들은 헌법이나 노동법 등 각종 법률 위반 소지가 있다. 무엇보다 원청이 용역업체 노동자를 직접 지시·감독하는 것은 불법파견에 해당한다.

하지만 지자체들 대부분은 고용부의 지적을 받고도 문제의 조항들을 여전히 수정·삭제하지 않고 있다.


그래픽= 송정근 기자

그래픽= 송정근 기자

한국일보가 24개 지자체의 계약서 개선 여부를 확인했더니, 부당·불공정 조항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곳은 8곳(서울 구로·동작구청, 경기 양주·이천·시흥시청, 울산 중구청, 경북 상주시청, 대전 유성구청)뿐이었다. 나머지 16곳(서울 종로·서초·양천·용산구청, 인천 동구·옹진군청, 경기 하남·의왕·안성시청, 강원 양양군청, 울산 울주군청, 대전 동구·서구·대덕구청, 충북 충주시청, 충남 서산시청)은 정부로부터 개선 권고를 받은 후 6개월이 지나도록 ‘갑질 조항’을 수정하지 않았다.


한 청소노동자가 화장실 소변기를 닦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청소노동자가 화장실 소변기를 닦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왜 부당?" 문제의식도 없어

갑질 조항을 수정·삭제하지 않은 지자체들은 이 같은 조항에 대해 문제의식조차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용역 계약의 기간이나 금액이 변경됐다면 계약서를 다시 썼겠지만, '경미한 사안'이라 바로 계약서를 수정하지는 않았다"며 “내년 신규 용역계약에는 이 조항들을 수정·삭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A지자체의 계약 담당자는 “솔직히 계약서 조항이 왜 부당한 지시라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갔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지자체가 용역업체와 맺은 계약서에는 “과업지시서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이라도 지자체가 요구하는 사항은 이유 없이 이를 행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심지어 이 지자체는 이런 조항들이 7개의 용역계약서에서 나와, 전체 24개 지자체 중 부당·불공정 조항이 포함된 계약이 두 번째(첫 번째는 9개 계약)로 많은 곳이다.

B지자체 담당자는 “용역업체 노동자에게 부당한 내용이라면 즉각 조치했겠지만, 용어에 대한 문제여서 내년부터 반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지자체의 계약서에는 “청소에 관한 (지자체) 담당자의 지시사항 불이행이 2회 이상 발생할 때는 다른 종사원으로 교체한다”, “계약담당자가 (용역업체가 채용한) 근로자에 대해 계약 수행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해 교체를 요구할 때에는 즉시 교체해야 하며, 계약 담당자의 승인 없이는 교체된 근로자를 다시 채용할 수 없다” 등 용역업체의 노동자의 해고와 채용에 지자체가 깊숙이 관여하는 조항들이 있었다.

임금 기준은 지키지 않아

지자체들은 용역업체 근로자들에게 적정한 임금을 주는 데는 무신경했다. 갑질 조항이 있었던 지자체 24개 중 절반(12개)은 노무비 산정 기준인 ‘시중노임단가’조차 지키지 않고 이보다 적은 돈을 용역업체에 줬다. 34곳 지자체의 88개 계약으로 확대하면 30개 계약이 시중노임단가를 지키지 않았다.

용역근로자 보호지침뿐 아니라 지방계약법 시행령도 시중노임단가를 기준으로 노무비를 산정하도록 하고 있다. 시중노임단가는 중소기업중앙회가 1년에 두 번(6월, 12월) 발표하는 일종의 ‘직종별 평균임금’으로, 최저임금보다 높다.

지자체가 노무비를 낮게 산정해서 지급하면 노동자들의 급여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일부 지자체는 “용역업체와 계약을 체결한 후 시중노임단가가 변동돼 노무비 계약 금액을 미처 조정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시중노임단가가 바뀌면 바로 계약도 변경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지자체들은 노동자에게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는지도 감독하지 않는 분위기다. 용역근로자 보호지침은 지자체가 용역업체로부터 "예정가격 산정 시 적용한 노임(시중노임단가)에 낙찰률을 곱한 수준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겠다"는 확약서를 받고, 이행 여부를 수시로 확인하도록 하고 있다. 업체가 임금을 착복하는 '중간착취'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88개 용역계약 중 15%(13개)는 '근로조건 이행확약서'를 제출받지 않았다. 또 실제 노동자들이 보호지침이 정한 임금을 받는지 지자체들이 확인하도록 하는 항목에 대해서는 이번 고용부 조사에서 점검하지 않았는데, 지키지 않는 곳도 분명 있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지침에서 말하는 임금이 그대로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지까지 확인해 볼 생각은 못 했다"며 "앞으로는 그 부분도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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