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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 여론 호소가 민주주의라는 착각

입력
2021.12.01 00: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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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정치가 나빠진 지 오래되었지만 어떤 정치인도 이런 정치 그만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 당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더 없다. 물론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닌 듯하다. 지금의 정치가 비호감의 대상이 된 것도 잘 알고 있고, 사석에서는 정치가로서의 비애를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지금 이게 정치 맞나 하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정치인은 없다.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도 정치인은 자기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중단 없이 34년째 하고 있는데도 정치가들이 자기 파당의 좁은 관점 안에서 더 순응적이고 더 동질화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커다란 역설이다. 가히 '정치가의 실종'이라 부를 만한 상황이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통치하는 체제가 아니다. 시민이든 민중이든 인민이든 그들은 통치하지 못한다. 정부를 운영하고 공공정책을 결정하고 국가 예산을 다루는 것은 적법하게 선출된 시민 대표들에게 맡겨진 일이다. 민주주의는 이 직업 정치가들과 그들의 조직인 정당이 통치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그들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적용하면서 권력의 자의성을 제어하고 상호 책임을 균형있게 부과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시민의 다양한 의견을 나눠서 조직하고 표출하면서 공익이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더 넓고 더 깊게 숙의해 '합의된 변화'를 이끌어야 민주주의다.

한동안 많은 이들이 정치가나 정당의 자율적 역할을 줄이는 대신 시민의 직접 참여를 확대하는 것을 민주주의라 오해해왔다. 정당도 직접 민주주의 개혁을 하겠다고 하질 않나, 대통령이 국회를 압박하는 국민서명운동에 참여하질 않나, 청와대가 입법과 사법의 영역까지 국민 직접 청원을 받는 일까지 나타났다. 결과는 참혹했다. 서로 마주 앉아 공동체의 문제를 풀어가는 정치인은 사라졌다. 여론에 직접 호소하고 지지자를 직접 동원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여기에 호응한 당파적 시민들은 서로 무례해도 좋다는 듯 행동하기 시작했다. 의견이 다른 시민들의 삶을 경멸하는 일에도 점차 익숙해졌다. 자신의 옳음만을 강변했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 사이에서 협동의 가능성도 줄었다. 자신을 돌아보며 지나침을 절제하는 '반성적 균형'의 힘이 발휘될 수도 없었다. 모두가 화가 나 있고, 모두가 억울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른바 직접 정치는 시민과 사회를 깊이 분열시켰고 적대와 증오의 아픈 상처를 남겼다.

정치는 좋을 때만 가치가 있다. 좋은 정치는 정치가의 좋은 역할 없이 실현될 수 없다. 정치가의 좋은 역할이 사라지는 것만큼 인간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없다. 시리아나 예멘 같은 나라들의 사례에서 보듯, 정치 대신 전사의 윤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강조했듯, "인류에게는 지배자로서든 동료 시민으로서든 자신의 의견이나 습성을 행동의 준칙으로 삼아 타인에게 강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민주주의에서 더 심해진다. 민주주의는 체제의 압제나 폭력을 줄이는 대신, 타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싶은 시민의 욕구를 키우는 문제를 낳는다. 따라서 정치가들이 시민의 대표로서 시민들의 다양한 이익과 열정 사이에서 조정과 협의, 타협과 공존의 길을 일구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할 수 있다. 정치가가 제 역할을 해야 민주주의가 산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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