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민혜진의 바탕이 된다고 봤다. 이걸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김현주 외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일주일째 넷플릭스 세계 1위(28일 기준)를 지키고 있는 '지옥'의 연상호 감독이 밝힌 김현주를 캐스팅한 이유다. 김현주는 혼란을 틈타 득세한 신흥 종교단체 새진리회에 맞서는 변호사 민혜진을 맡아 열연했다. 혹자는 김현주의 '재발견'을 말하지만 앞선 연 감독의 말이 적확하다. 광고 카피 "국물이 끝~내줘요"나 트렌디 드라마 속 청순 발랄한 이미지 안에 그를 가둔 건 대중일 뿐, 김현주는 1996년 데뷔 이래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탄탄히 다져온 숙련된 연기자다.
"데뷔 때 캐릭터를 장시간 유지했는데 그건 제가 의도했다기보단 그런 부분을 시청자들이 좋아해주셨기 때문이었죠. 그런 작품들만 많이 들어왔고, 그 안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지난 26일 화상으로 만난 김현주는 "('지옥'으로 인해) 선택의 폭이 넓어질 수 있겠다"며 "그건 제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MBC 드라마 '햇빛 속으로(1999)' 등으로 청춘스타로 각광받았지만 서서히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에겐 연기를 담금질한 시간이 됐다. 지상파 3사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안긴 KBS '인순이는 예쁘다(2007)', MBC '반짝반짝 빛나는(2011)', SBS '애인 있어요(2015)' 등을 통해 자신의 건재를 알렸다.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갈증이 많았죠. 도전이 두렵긴 하지만 도전을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기 때문에 이대로 퇴보하거나 멈춰지는 데 대해선 또 강하게 거부감이 있었어요."
2019년 방영한 OCN 드라마 '왓쳐'가 기폭제였다. 상류층 블랙 거래 전문변호사를 연기하면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것. 그는 "좀더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와 만나고 싶은 게 저의 욕심이자 계획"이라며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해보지 못했던 걸 해보려고 노력 중"이라고 강조했다.
'지옥' 역시 그에겐 도전이었다. 삼단봉을 휘두르고, 쇼트커트를 한 '지옥'의 민혜진은 넷플릭스 액션 영화 '올드 가드'의 샤를리즈 테론을 떠올리게 한다. "액션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제게도 또 다른 가능성이 있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돼 너무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는 "제가 생각보다 몸을 쓸 줄 알더라"며 "제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었다"고도 했다.
'지옥'은 정진수(유아인), 진경훈(양익준)이 주도하는 전반 3부작과 배영재(박정민), 송소현(원진아)이 이끄는 후반 3부작으로 나뉘는데 민혜진만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다. 김현주는 "중반 이후 캐릭터 변화가 있기에 어떻게 한 캐릭터로 연결해 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며 "처음부터 민혜진은 아주 정의롭거나 강단 있고, 고집스럽지 않아야겠다, 똑같이 나약한 인간 중 하나로 여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밸런스를 잡았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접한 영화 스케일의 '지옥' 촬영 현장은 "배우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연 감독이 연출하는 넷플릭스 SF영화 '정이' 촬영에도 한창이다. "제가 멈춰 있는 동안 현장에도 많은 발전이 있었더라고요. 촬영기법이나 연기했던 방식과 톤까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틀을 깨고, 유치원생처럼 하나하나 배우면서 촬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저는 민혜진처럼 맞서 싸우지 못하고 '누가 내 앞에서 싸워줬으면' 하는 사람인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포용력도 생기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또다른 도전을 예고했다.
무엇보다 그 역시 '지옥' 시즌2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저는 아이와 함께 꼭 나오겠네요, 하고 농담처럼 얘기하곤 했는데요.(웃음) 어느 곳에선가 그 아이를 제 딸처럼 강인한 여성으로 키우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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