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일대기]
빈농의 아들에서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뒤 간접선거로 11·1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임기 7년 동안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을 누리며 고도의 경제 성장기를 보냈으나, 퇴임 후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 책임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무고한 국민들의 피눈물과 맞바꾼 그의 권력욕은 한국 현대사의 여러 굴곡을 만들어냈다. 마지막까지 이에 대한 사과 없이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삶이다.
빈농 아들, 임관 후 박정희 눈에 띄다
전씨는 1931년 경남 합천의 빈농에서 6남 4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곤궁한 집안 사정으로 학창시절에도 일본인 식품공장에서 배달을 하는 등 가족 부양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대구공고를 졸업한 그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 성적은 228명 중 끝에서 두 번째였다. 육사 합격은 내 인생에 있어 운명적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생도 시절 학업성적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편이었으나 체력이 좋아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당시 육사 참모장인 이규동 대령 관사를 출입하면서 그의 차녀인 이순자를 만나 후일 결혼에 이른다.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주도한 5·16 쿠데타 당시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선언을 주도하면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든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비서관에 임명돼 출세가도에 오른다. 이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과 육군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30대대장, 1공수여단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 요직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한다.
10·26 및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 장악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1979년 유신 통치의 종말을 고한 10·26 사태가 터진다. 전씨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사건 수사와 처리를 담당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격을 가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체포하는 등 권력 장악에 들어간다. 같은 해 11월부터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등 동기인 육사 11기가 중심인 사조직 '하나회'를 바탕으로 신군부를 형성한 전씨는 당시 계엄사령관이자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는 등 12·12 신군부 반란으로 권력 장악의 야욕을 노골화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 재가 없이 진행된 뒤 사후 재가를 받았고, 신군부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까지 체포했다.
1980년 5월 1일부터 서울역 광장에서 전국의 대학생 10만여 명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서울의 봄'으로 알려진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전씨는 정세 불안 해소를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했다. 정당·정치 활동 금지 및 국회 폐쇄 등의 조치를 내렸고 영장 없이 정치인·재야 인사·대학생들을 구속하는 등 민주화 세력을 본격 탄압했다.
5월 18일 광주에서 '계엄령 철폐'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항의시위가 발생하고 신군부는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해 무력 진압에 나서면서 유혈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같은 달 27일까지 광주에서 계속된 계엄군의 진압으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숨졌다. 전씨는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유신헌법에 따라 설치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듬해인 1982년 2월 또다시 간선제로 치러진 대선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경제 발전 이면엔 '민주화 억압'
그는 정권의 정통성 논란을 희석시키기 위해 재임 중 경제발전에 전력을 쏟았다. 당시 경제교사 역할을 했던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한 발언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3저에 힘입어 경기가 살아나면서 국민총생산이 상승하고, 매년 평균 경제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면서 경제 호황이 이어졌다. 1986년 아시안게임 개최에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면서 대외적인 신인도를 끌어올렸지만 일각에선 스포츠로 국민들의 시선을 돌렸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경제 발전의 이면에는 민주화 요구에 대한 억압이 자리했다. 1980년 비상계엄 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정책 차원에서 만든 삼청교육대는 희대의 인권탄압 사례로 기록된다. 반체제 인사와 범죄자, 건달 등을 훈련과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비인간적인 고문에 가까운 행위를 가해 수십여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남겼다.
민주화 운동 탄압은 임기 내내 지속됐다. 1987년 4월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들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는 호헌조치 발표로 국민들의 반발은 커졌다. 그 해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고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졌다. 결국 6·10 민주항쟁으로 당시 집권여당 대선후보였던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권 이양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해 수습했다. 이로써 전씨는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났다.
북한의 타깃이 되기도 했다. 1983년 동남아 순방 중 미얀마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기 직전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그보다 현장에 먼저 도착해 있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 공직자와 취재진이 즉사했다.
퇴임 후 백담사 은둔과 '전 재산 29만 원' 논란
퇴임 이후 5공 비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문제가 본격 제기됐다. 그는 1988년 국회 5공 비리 청문회에 출석해 5·18 유혈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하자, 이철용 평화민주당 의원이 "살인마"라고 반발한 것은 상징적 장면이다. 전씨 형제들이 비위 혐의로 구속되고 대규모 학생시위가 이어지면서 전씨와 부인 이순자씨는 강원도 백담사로 내려가 769일간 은둔생활을 했다.
1993년 2월 출범한 문민정부는 전씨를 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12·12 군사반란과 5·18 유혈진압의 책임을 묻는 거센 국민적 요구에, 김영삼 대통령은 5·18 특별법을 제정해 전씨에 대한 수사의 길을 열었고, 1996년 1월 검찰은 전씨를 반란수괴 및 살인,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당시 그는 대법원 판결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으나, 김영삼 정부 말인 1997년 12월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특별사면을 통해 풀려났다. 그러나 통장에 29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며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았다.
서훈 취소 등 마지막까지 수난
전씨의 수난은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국무회의에서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3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을 환수하는 결정을 내렸다. 전씨는 훈장을 반환하지 않다가 7년 만인 201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12·12 이후 받은 9개의 훈장을 반납했다.
2017년 4월 출간된 회고록도 도마에 올랐다. 여기서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고, 자신을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고 주장했다. 5·18기념재단 등이 허위사실 적시 등을 이유로 출판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순자씨도 2017년 자서전에서 "우리 내외도 5·18사태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주장해 논란이 됐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