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넷플릭스 '패싱'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1990년대에도 지금처럼 머리가 짧았다. 단발보다 짧은 커트 머리의 여자 어린이를 만나기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어른들은 영락없이 나를 남자 어린이로 보았다. 어느 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다가, 친구들 앞에 수저를 놓아주며 "레이디 퍼스트"라고 말하는 장난을 쳤다. 어디선가 그 말을 듣고 와서 써보고 싶었던 것 같다. 조금 뒤 시키지 않은 튀김만두 한 접시가 우리 테이블에 놓였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 중학생들이 이 테이블의 남자 어린이가 여자인 친구를 배려하는 모습이 기특하다며 시켜준 것이라고 했다. 지금이라면 친구들에게 "저쪽 손님분이 주신 겁니다"라는 농담을 던지며 복숭아맛 유산균 음료가 든 플라스틱 컵을 들고 건배하는 시늉이라도 했겠지만, 십 년 하고 조금 더 산 어린이였던 내게 그런 센스가 있었을 리 없으므로 꾸벅 인사만 하고 만두를 받아들었다.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내 성별을 밝히고 설명을 하느니 별것 아닌 오해는 가볍게 넘어가고 만두를 떡볶이 국물에 넣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몰랐지만, 당시의 나는 남자 어린이로 '패싱' 된 상황을 이용한 셈이었다.
패싱이란, 인종이나 젠더, 민족 등과 같이 실제로는 스펙트럼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명확한 구분 선을 긋고자 하는 개념 안에서, 개인이 속하지 않은 쪽의 구성원으로 여겨지는 상황이나 그렇게 여겨지도록 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다. 소수자거나 혐오나 편견의 대상이 되는 쪽에서 그 반대편에 속한 '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말투, 행동을 바꾸어서 인종이나 젠더 고정관념에 맞추어 바꾸고, 일정 부분은 연기하는 것이다. 지난 1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패싱'은 흑인과 백인 인종 사이의 '패싱'을 다룬 작품이다. 여기에서 '패싱'은 좀 더 좁은 의미에서 피부색이 밝은 편인 흑인이 백인 행세를 하면서 살아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1920년대 뉴욕, 흑인 의사와 결혼해 뉴욕 할렘의 중산층으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아이린(테사 톰슨)은 우연히 학창 시절 친구인 클레어(루스 네가)를 만난다. 아이린은 처음에 클레어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클레어가 완벽한 백인의 얼굴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주의자이며 흑인을 혐오하는 남편과 사는 클레어 때문에 재회의 날부터 클레어 부부 앞에서 백인 행세를 해야 하는 모멸적인 상황을 겪은 아이린은 클레어를 피하려고 하지만, 아이린을 통해 흑인 커뮤니티에 들어오려는 클레어를 끝까지 막을 수는 없다. 아이린 주변 사람들과 남편인 브라이언(안드레 홀란드)까지도 클레어에게 매력을 느끼면서 아이린은 점차 불안을 느끼고 두 사람의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흑인에게는 모멸적인 호칭을 애칭으로 듣는 것까지 감내하며 백인 유력 사업가 남편의 곁에서 백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클레어가 언제,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지 궁금해지는 초반부를 지나고 나면, 영화는 아이린의 변화하는 심리에 집중한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살아가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왔고, 가지려는 클레어를 보면서 아이린은 계속 불안해하며 클레어를 자신이 꾸려온 세계 안에서 쫓아내고 싶어한다. 이는 단순히 클레어가 흑인 공동체에서 주목과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질투가 아니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왜 백인으로 살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불안하다. 동시에 왜 흑인 커뮤니티 안에서 이들의 문화를 느끼며 지내고 싶은지 알기 때문에 불안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과 나로서 살아가려는 욕망은 아이린 안에도 공존한다.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패싱이 가능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린은 클레어를 통해서 자신을 보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인생을 상상할 수 있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피부색 때문에 폭력과 혐오에 노출될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크고 작은 일상의 걱정을 덜어낼 수 있을 정도의 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런 삶은 과연 어떨까? 영화의 첫 장면, 백인들 틈새에서 자연스럽게 패싱된 채로 장난감을 사고 있던 아이린의 모습에서 이미 아이린이 그 삶의 일부를 훔쳐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류층 백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클레어의 삶과 중산층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아이린의 삶 사이 겹쳐진 어딘가에서, 둘은 사실 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원작 소설의 영상화 과정에서 이들의 피부색을 흑백화면에 담기로 한 결정은 영민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름만 이분법적이고 실제로는 회색 조인 흑백화면은 오히려 흑인과 백인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을 모호하게 흐려놓는다. 색이 빠지고 명암만 남긴 화면 속에서 인종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짙고 옅음이다. 어느 정도까지 밝아야 백인이고 또 흑인인지 누구도 알 수 없고 기준을 세울 수도 없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와 통념이 그어 놓은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는 두 여성을 보여주기에 걸맞은 형식이다.
1920년대 흑인 할렘 문화 부흥 운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인 넬라 라슨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하면서, 인종의 모호한 경계까지 화면에 담아낸 감독은 배우 출신의 리베카 홀이다. 리베카 홀은 인종과 젠더, 계급과 연결된 원작 속 복잡한 질문을 던지는 일도, 이를 영상으로 담아내려는 야망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린과 클레어를 연기한 두 배우의 피부색을 알고 있다면, 화면 속에서 한 번 더 밝아지고 또 어두워지면서 보는 사람을 착각에 빠뜨리며 패싱되는 상황을 예민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인물 사이의 성적 긴장감을 포착하고 복잡한 감정선 안에 이를 담아낸 두 배우의 연기와 1920년대 뉴욕의 풍경을 유려한 농담(濃淡)으로 담아낸 아름다운 화면을 극장에서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어떤 크기의 화면이든 올해 놓치지 않아야 할 미장센이다.
이제 '패싱'의 복잡한 질문에 관해 이야기할 차례다. 첫 문단의 에피소드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게 맞을지 오래 고민했다. '패싱'은 인종 정체성 문제, 그중에서도 미국의 흑인과 백인 사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종 패싱이 아닌 젠더 패싱에 대한 예를 들면, 오해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젠더 패싱은 인종 패싱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내가 어린 시절 남자 어린이로 '여겨졌던' 상황을 묘사한 이유는, 보통의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외양만으로 정체성을 판단하는지, 얼마나 간단하게 '패싱'해버리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남자 어린이로 여겨졌던 나처럼, 넬라 라슨의 원작에 있는 문장 그대로 패싱이 되는 것은 "정말 엄청나게 쉬운 일"일 때도 있다. 하지만 소수자가 다수자로 패싱되기를 선택할 때, 발각의 위험성뿐만 아니라 자기혐오와 모멸감 또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패싱'은 이 행세를 하고 또 하지 않는 선택이 어떤 위험과 불안을 불러오는지, 복잡한 사회와 역사, 문화, 환경 속에서 내가 속한 인종과 젠더, 계급과 소유까지 고민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또 인정하면서 '나 자신이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한 개인의 육체가 가진 외양을 드러내지 않고도 가능한 능력 안에서 실물로서의 나와는 다른 '나'를 수없이 만들어내고 연기할 수 있는 장(場)이 허락된 지금이야말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여러 각도에서 다시 던져야 하는 시대다. 차별을 피하고 이득을 얻기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된다는 것은 개인에게 그리고 사회에 어떤 의미일까? 한 사회의 구성원이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들로 인해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제도와 법이 있다면, 누구나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21세기를 사는 현대 사회의 시민인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100년이라는 시간도 낡게 만들지 못한 '패싱'의 질문에 대한 답 역시 흑이거나 백일 수 없을 것이므로, 이렇게 길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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