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암시민 살아진다. 살암시난 살아져라."
뜻을 가늠하기 어려운 이 말은 '살다 보면 살 수 있다. 살다 보니 살아지더라'라는 제주어다. KBS제주방송총국에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 사람 이야기를 제주어로 벼려 낸 32년차 방송작가 김선희(54)씨가 꼽은 가장 애틋한 '제줏말'이다. 무릇 언어가 그렇듯 제주 사람들의 정체성과 문화가 그 속에 오롯이 담겨 있어서다.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서 나고 자란 제주 토박이, 김 작가가 소멸 위기의 제줏말로 10년째 드라마를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지역어를 방송에 낸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 생소했죠. 나의 제줏말 대사가 방송을 타고 다른 이들의 귀로 전해진다는 게 굉장히 뭉클했고, 감회가 새로웠어요." 그 시작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제주도민을 찾는 교양 프로그램 '보물섬'의 한 코너로 '이야기 제주사'를 방영하면서부터다. 제주의 탄생부터 근현대사까지 역사의 전환점들을 20분 분량의 재현 드라마로 2년여간 138회 선보였다. "제주의 이야기를 좀 알자, 탐라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지 않은 제주의 역사를 한 번 정리해보자"는 게 목표였다. 지루한 역사를 흥미롭게 풀기 위해 드라마 형식을 빌렸고, "제주인의 시각으로, 제주 사람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제줏말로 하자"고 딱 두 가지만 생각했다.
결과는 대성공. 로컬 프로그램으로는 드물게 평균 시청률 15%를 냈다. "제주에 이런 이야기가? 그걸 또 제줏말로? 이런 반응이었죠. 특히 제줏말이 익숙한 40대 이후부터 노년층까지 '이게 진짜 우리 이야기구나'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김 작가는 "제주 사람이니 제줏말을 쓰는 게 맞다는 우리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 그리고 이게 지역방송국의 존재 이유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제주 속담과 생활사, 풍습을 총 97회에 걸쳐 다룬 '요보록 소보록', '불휘지픈 제주', '뜻밖의 제주'를 연달아 선보였다. '이야기 제주사'와 함께 여태 그가 가장 자부하는 프로그램들이다.
그렇게 축적한 노하우로 2018년에는 지역방송국 최초의 12부작 미니시리즈 '어멍의 바당'을 내놓았다. "내 마음대로 제줏말을 가지고 대사를 쓰는 순간 후련해지면서 가슴이 다 시원하던걸요." 그의 대본과 제주에서 활동 중인 제주 출신 연극배우 몇 명, 어떻게든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PD와 카메라감독이 전부인 상황에서 제주 해녀 3대의 이야기를 담은 연속극은 탄생했다. 지난달부터는 '우리가 몰랐던 제주인' 4부작도 선보였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만장굴을 발견한 부종휴, 일제강점기 일본 복싱계를 주름잡은 현해남, 한양 도성까지 왕진을 간 의녀 장덕과 귀금, 제주목사의 만행을 고발한 관기 곤생이 등 제주인의 기개를 떨친 역사적 인물 4명을 조명한 드라마다.
"흩어져 있는 제주의 한 줄 조각을 모아 이야기로 담아 온 작업"이었다는 게 김 작가의 설명. 여전히 지역에서 자체 드라마를 만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고증이 필수인 역사물은 더욱 그렇다. 조선왕조실록의 한 줄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런 다음엔 제주로 유배 온 외부인이나 제주목사 등이 남긴 자료에서 관련 기록을 전부 찾아 훑는 식이다. 제주대 사학과 교수와 함께 머리를 싸매기도 한다.
"지금 제주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알아야 될 이야기, 알려야 될 이야기. 어떻게든 이것들을 알려야겠다는 저 나름의 소명이 생긴 것 같아요." 욕심 같아선 제주 사람의 이야기로 대하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제라진(제대로의, 정확한이라는 뜻의 제주어) 이야기, 제라진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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