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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딸과 갱년기 엄마의 작은 전쟁

입력
2021.11.11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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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기도하는 학부모와 막바지 시험 준비를 하는 수험생들. 연합뉴스 뉴시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기도하는 학부모와 막바지 시험 준비를 하는 수험생들. 연합뉴스 뉴시스

며칠 전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일 하느라 시간이 어느덧 10시가 된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기로 한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최근에 "엄마는 고3인 딸에게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라는 푸념을 들은 터라, 아차 싶었다. 서둘러 컴퓨터 전원을 끄고, 부랴부랴 건물을 빠져나와 차에 시동을 걸며 전화를 걸었다. 혼자 버스 타고 알아서 집으로 가겠다며 전화를 툭 끊는 걸 보니, 삐졌나 보다.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피로가 급작스레 몰려왔다.

온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뻑뻑해진 눈을 껌뻑이며 귀가하고 보니, 딸은 강아지를 안은 채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나에게 평소와는 달리 아무 말도 없는 딸. '그래 네 마음 알겠어. 그런데 오늘은 엄마도 피곤하고 힘들어. 엄마라고 언제나 너희를 위해 쓸 에너지가 남아도는 건 아니야' 하는 소심하고 울컥한 마음에, 나도 딸을 본체만체 한마디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씻는 동안에도 괜스레 마음이 울적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아본 기억도 별로 없고, 감히 투정 한 번 부리지 못하고 컸는데, 애지중지 키운 내 자식은 작은 것 하나에도 이렇게 서운해하는구나 싶어 서러운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그날 밤 고3 수험생 딸과 갱년기의 엄마는 그렇게 미묘하게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어른이라고 항상 마음이 넓고 지혜로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이를 먹어도 마음이 옹졸해지고 유치해질 때가 있는데, 일에 지치고 힘들었던 그날 내가 그랬던 것 같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자러 간다며 인사를 하러 온 딸아이가 "엄마, 엄마도 다롱이를 좀 안고 있어 봐요. 스트레스에 꽤 도움이 돼요" 하고는 조용히 안방 문을 닫아 주고 가는 게 아닌가. 수험생의 불안하고 지친 마음을 보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나도 참 어른답지 못하기도 하지… 그렇게 씁쓸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깨우러 갔더니, 잠에서 덜 깬 채 악몽을 꿨다며 울먹이는 아이에게 꿈 내용을 물었다. 학원을 마치고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도 가도 집이 나오지 않고, 분명히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나중에 보니 집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었다고, 깜깜한 밤에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고, 가도 가도 집이 안 나와서 너무 무서웠다고 울먹이는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아이고, 엄마가 잘못했네. 엄마가 어젯밤에 데리러 가지 않아서 네가 이런 꿈을 꿨나 보다. 엄마가 미안해." 그제야 아이는 "아, 그러네, 엄마가 잘못했네. 엄마 때문에 악몽을 꿨네"라며 비로소 웃었다.

부끄러웠다. 전날 밤 아이는 자러 가기 전 안방에 들러 제 딴엔 엄마도 피곤하고 힘들어 약속을 잊었나 보다 싶어 강아지 운운하며 화해의 몸짓을 먼저 취했는데, 수험생의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걷어 주지는 못할망정 나는 내 감정에만 사로잡혀 옹졸하게 굴었다. 아이의 마음을 좀 어루만져 주고 재웠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가도 가도 집이 나오지 않는 무서운 꿈은 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수능시험이 딱 일주일 남았다. 불안한 수험생 못지않게 부모 역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꼭 안아 주고 보듬어 주어야 할 때다.


이정미 서울상담심리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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