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소리에 나가 보니 온통 검은 구름이…” 한국인 피폭자의 증언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쾅’ 소리에 나가 보니 온통 검은 구름이…” 한국인 피폭자의 증언

입력
2021.11.07 08:00
수정
2021.11.07 17:20
0 0

[나가사키 거주 95세 권순금씨 인터뷰]
매년 추도식에 한복 차림으로 참석해
남편은 약 40년 전 암으로 세상 떠나

5일 일본 나가사키시의 야키니쿠 식당 ‘아리랑정(亭)’에서 한국 언론사 특파원단과 만난 한국인 피폭자 권순금(95)씨가 남편인 고 조연식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씨는 암으로 1983년 세상을 떠났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우리 민단이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만들어야 하는데 돈이 부족해서 어렵네.”

5일 일본 나가사키시의 야키니쿠 식당 ‘아리랑정(亭)’에서 한국 언론사 특파원단과 만난 한국인 피폭자 권순금(95)씨는 대화 도중 방금 이야기한 내용을 자주 잊곤 했다. 재일동포사회가 약 30년의 노력 끝에 6일, 드디어 한국인 피폭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소감을 물었는데도 금세 잊고 ‘돈이 부족하다’며 계속 걱정했다. 기자들이 여러 차례 건립 사실을 다시 설명하자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제막식에 가고 싶다”고 밝혔다.

하지만 마음만 그러할 뿐, 거동이 매우 불편한 지금 상태로는 갈 수 없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나가사키시가 주최하는 원폭 희생자 추도식에 “우리 사람(한국인)이라는 걸 알리려고” 매년 치마저고리를 입고 참석할 정도로 정정했던 권씨다. 2010년 8월 5일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나가사키를 방문했을 때도 한복을 입고 반 총장과 회견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얼마 남지 않은 한국인 피폭자를 대표해 활발한 활동을 해 온 그도 세월을 비켜갈 수 없었다. 올 들어 급속히 건강이 나빠지고 거동이 불편해져 이제 방 밖으로 나가기조차 버겁기 때문이다.

유엔 사무총장으로는 처음으로 원자폭탄 투하지를 방문한 반기문(오른쪽)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2010년 8월 5일 일본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해 함께 걸어가자"고 연설하고 있다. 옆은 부인 유순택 여사. 이날 반 총장은 권순금(당시 84세) 할머니 등 재일동포 원폭 피해자를 만났다. 나가사키=AP 연합뉴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4세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아버지가 먼저 향했던 일본 교토로 건너온 권씨는 차별과 가난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7년 전에 쓴 수기에 따르면, 초등학교에서 “마늘 냄새 나!” “조선인!”이라는 놀림을 당했고, 비 오는 날 치마저고리를 입고 우산을 주러 온 모친이 창피해 몰래 혼자 돌아간 경험도 있다고 한다. 15세 때 나가사키에 이사 온 그는 이곳에 자발적 혹은 강제로 일하러 온 조선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함바(현장숙소)를 운영하던 아버지를 도와 일했다. 공장 또는 공사 현장이 있던 섬에 매일 물을 지고 실어 나르는 등 힘든 노동을 하다 18세 때 결혼했다. 그리고 남편 조연식씨와 함께 함바를 운영하던 1945년 8월 9일, ‘그 일’이 발생했다.

“‘쾅’ 하고 굉장한 소리가 나기에 나가 보니, 하늘에 온통 검은 구름이 떠 있더라고. 그땐 몰랐는데 사람들이 그게 원폭이라 하더라. 처음엔 원폭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냥 보통 폭탄인 줄 알았네.”

당시 폭심지에서 1.8㎞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건물 안에 있었기 때문에 부부는 살았지만, 권씨의 여동생 영자씨와 승자씨는 모친과 바깥에 있다가 외부 피폭을 당했다. 영자(당시 4세)씨는 나중에 혈액암(다발성 공수종)에 걸려 숨졌다.

미국은 1945년 8월 두 개의 원자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했다. 이는 사상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핵무기가 전쟁에서 쓰인 사건이었으며, 일본은 그 해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사진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흘 뒤인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버섯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 나가사키=AP 연합뉴스

수기를 보면, 권씨는 당시 불에 탄 것 같은 사람들이 숙소 앞을 줄줄이 걸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을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났고, 강에는 말과 소뿐 아니라 사람 시체도 무수히 떠 있었다. 남편 조씨는 숙소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을 찾아다녔으나 두어 명이 숨졌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 부부는 손수레에 고철을 모아 파는 등 갖은 일을 해 번 돈으로 1963년 아리랑정을 개업했다.

남편 조씨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나가사키현 지방본부 단장과 나가사키상은신용조합 이사장 등을 지내며, 민단부인회 활동을 오래 한 부인 권씨와 함께 재일한국인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983년 통증이 심한 탓에 검사를 받았더니,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됐다. 암은 이미 췌장에서 간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입원한 지 겨우 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조씨는 “오모니(여보), 갑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권씨는 남편에 대해 “훌륭한 사람입니다”라며 한국에서 훈장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6일 오전 일본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제막식이 열렸다. 위령비는 일본 나가사키시 원폭기념관 앞에 건립됐다. 나가사키=최진주 특파원

권씨가 검은 구름을 본 후, 나가사키에선 7만4,000명이 원폭으로 숨졌다. 한국인 희생자도 수천~1만 명에 이른다. 권씨가 염원했던 나가사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6일 오전 제막식을 갖고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세워졌다. 권씨는 “감개무량합니다. 그저 기쁠 뿐”이라고 말했다.

나가사키= 최진주 특파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라이브 이슈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