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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병에 효자 없다지만...루푸스 환자 아내와 딸은 10년 세월 한결같았다

입력
2021.11.16 17: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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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최상태 내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환자의 호흡이 점점 불안정해졌다. 가래 끓는 소리도 심해졌다. 산소 농도를 계속 올렸지만 산소 포화도는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다. 이른 새벽, 결국 중환자실로 이송했다. 그리고 기계 호흡을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항생제를 쓰기 시작했지만, 폐렴이 점점 악화하더니 이렇게까지 진행하고 말았다. 감염내과와 상의해 항생제를 바꾸었다. 이젠 더 바꿀 항생제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지금 쓰고 있는 약들이 잘 들어 회복되기를 기도할 뿐. 하지만 환자의 전신 상태를 보면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솔직히 확신이 안 선다.

토요일. 아무도 없는 텅 빈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인과 딸에게 환자의 상태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는데, 부인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지난 10년 동안 단 하루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나하고 딸이 남편을 돌봐 왔어요. 그렇게 사랑 많이 받았으니까 이렇게 가더라도 괜찮을 거예요.”

말을 이어가는 부인의 눈가는 젖어 들기 시작했고, 그 옆에 말없이 서 있던 딸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내 눈시울도 시나브로 붉어져 갔다.

지난 20여 년 동안 내과 의사로 살아오면서 보호자들에게 환자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해 왔다. 그중 어느 한 명 안타깝지 않은 인생이 없었고, 맘 편히 이런 이야기를 전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건만,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중에 이렇게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진 건 아마도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이 환자를 처음 만난 지도 어느새 6년이 되어간다. 전신홍반루푸스. 그가 갖고 있는 병의 이름이다. 면역세포가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자기 몸을 공격해서 여기저기 염증을 유발하는 대표적 자가면역질환이다. 루푸스는 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진단 후 2년 생존율이 50%가 채 되지 않던 병이었는데, 이제는 10년 생존율이 90%에 달할 정도로 치료가 많이 발전했다. 그렇지만 환자에게도, 의사에게도 여전히 쉽지 않은 질병이다. 10년 전 교통사고로 심한 뇌출혈이 있었던 그는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하반신이 마비되고 사고 및 인지 능력도 저하됐다. 그 와중에 루푸스라는 질병이 찾아왔다.

내가 환자와 직접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지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몸 상태가 비교적 좋은 날, 외래 진료 때 부인이 “교수님이 맛있는 약 주시는데 감사하다고 인사해야죠”라고 이야기하면, 환자는 움직일 수 있는 일부의 얼굴 근육만 사용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짧은 소통이었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나도 환자와 정이 많이 들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다. 혼자서는 앉아 있을 수도, 스스로 밥을 먹을 수도, 배변도 처리할 수 없었다. 그의 곁에는 항상 아내와 딸이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남편과 아빠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한 번도 힘들어하는 내색이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아픔을 누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더욱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환자를 바라보며, 내가 보고 있는 여러 환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부분 중증 혹은 희소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이다. 그중엔 조금만 방심하면 곧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환자도 여럿이다. 행여 병이 악화하지는 않을까, 혹은 부작용이나 합병증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살얼음판 걷듯 노심초사하며 조심조심 약을 쓰고 경과를 지켜보는 환자들이다. 그들은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치의인 내게 온전히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맡기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병원에서 환자를 고객이라고 부르지만, 아직도 나는 그 말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상호관계가 아니라, 의료지식이라는 상품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사고파는 식의 계약관계로 치부되는 것 같아서다. 환자는 의사에게 의존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의사 역시 환자에게 철저히 의존적이다. 의사는 환자가 있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환자가 있기에 의사인 내가 존재하며, 그렇기에 그들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이들이다. 내가 마주하는 건 질병이 아니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며, 나의 치료대상 역시 질병이 아니라 질병을 가진 인격체인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다른 사람에 의지한 채 아무런 사회적 생산성 없이 살아갔지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그의 가치를 훼손할 수는 없다. 사회는 우리에게 가진 것으로, 또 성취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만, 생명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그렇기에 그의 가족들은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했고 나 역시 그러했다.

내가 주로 보고 있는 자가면역질환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단기간 내에 완치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최소 수년 이상, 때로는 거의 평생에 걸쳐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의사와 한 번 맺은 관계는 오래 지속된다. 과연 그들은 내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분들일까? 반대로 나는 그들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환자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수일이 흘렀다. 가족도 나도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는 결국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의 품을 조용히 떠나갔다. 이젠 더 이상 그 환자도, 그의 가족들도 만날 일이 없다. 환자와의 긴 인연은 이렇게 끝났다. 그러나 그와 그 가족들에 대한 기억은 오래토록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중앙대병원 류마티스내과 교수

중앙대병원 류마티스내과 교수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라면 누구든 원고를 보내주세요.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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