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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갑질 '뿌수는' 사람들

입력
2021.11.0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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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를 이끌고 있는 상근활동가와 법률스태프들. 직장갑질119 제공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를 이끌고 있는 상근활동가와 법률스태프들. 직장갑질119 제공

2017년 4월 텅 빈 광장에 10여 명의 청년이 모였다. 반년 가까이 광화문광장을 지키며 촛불 시위에 앞장서 온 사람들이다. 모인 이유는 단순했다. "이제 우리 뭐하지?" 연인원 1,700만 명이 참여했고, 결국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됐다. 역사에 길이 남을 '촛불 혁명'이자 '촛불 항쟁'이었다. 이 힘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누군가 던진 화두가 실마리를 제공했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이 돌아가는 곳이 어디일까?" 회사, 일터, 직장. 생각해보니 40년 독재 정치를 끝낸 1987년 '6·10 항쟁' 직후에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 거리에 나왔던 시민들이 '이제 우리 회사에도 민주적인 노조를 만들어보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기 논의는 거칠고 투박했다. 이름부터 '누구에게나 노조가 필요해'였다. 제2의 민주노조 설립운동을 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1987년과 2017년은 다르고, 또 달라야 했다. 다짜고짜 노조부터 만들자가 아닌, 평범한 회사원들이 직장을 바꿀 수 있는 캠페인을 해보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2017년 11월 1일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는 그렇게 탄생했다.

지난 4년간의 성과는 자신들도 놀랄 정도다. 신입 간호사들에게 선정적인 옷을 입혀 장기자랑을 하게 한 한림대성심병원 사건과 직원들을 마라톤 동호회에 강제로 가입시킨 쿠쿠전자 사건, 외주업체 직원들에게 현금이 아닌 상품권으로 임금을 지급한 방송업계 '상품권 페이' 사건 등이 실체를 드러냈고, 잘못된 관행들이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2018년 12월 동양에서 처음으로 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만들어진 것도 이 단체의 역할이 컸다.

그동안 이메일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접수된 제보 사연만 10만 건에 달한다. 회사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유형의 직장갑질 사건들이 빅데이터로 쌓이고 있는 셈이다. 상담 활동 외에도 '직장갑질 뿌수기 공모전'을 시행하기도 하고, 설문조사만 25차례나 해 결과를 발표했다. 매주 주말에 정기적으로 배포한 보도자료도 210건에 달한다. 노동운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아이돌 스타라 불릴 법하다.

그럼에도 이들의 고민은 '생존'이다. 직장갑질119의 수입은 매달 약 600만 원씩 들어오는 후원금과 공익법인인 공공상생연대기금으로부터 받는 지원금이 전부다. 단체의 특성상 정부나 기업의 후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근자 4명을 제외한 140명 정도의 법률스태프(변호사·노무사)는 돈을 받지 않고 '재능 기부'를 하며 상담을 해주고 있다. 기금에서 나오는 지원금은 올해로 끝난다고 한다.

사실 직장갑질119의 가장 큰 성과는 '직장갑질'이란 단어다. 원래 갑질은 서비스 노동자나 하청업체 직원 등 갑을관계가 명확할 때 주로 쓰이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쉽게 직장갑질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다. 회장님, 사장님뿐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갑질을 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을 심어줬다. '사무실과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는 직장인들의 인권이, 촛불의 바람을 타고 일상에 스며들어 일터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 힘이 계속 이어지려면 더 많은 응원과 후원이 필요하다.

유환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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