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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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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했다

입력
2021.10.29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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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작가.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유리 작가. 문학과지성사 제공


별안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계가 있다. 죽은 아빠의 유골을 화분에 옮겨 심었더니 나무로 되살아나질 않나(‘빨간 열매’), 복싱 선수인 남자친구의 오른손이 어느 날 갑자기 브로콜리로 변한다(‘브로콜리 펀치’). 교통사고로 죽은 옛 애인이 5년 뒤 손톱에 빙의해 신혼집 안방에 나타나는가 하면(‘손톱 그림자’), 돌멩이(‘치즈 달과 비스코티’)나 이구아나의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이구아나와 나’). 그런데 정작 이 세계를 창조한 사람은 태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괴하지 않다. 그리고 기괴하지 않은 정신병은 사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유리 작가의 ‘브로콜리 펀치’는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기이한 일들이 일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며 펼쳐지는 이야기들을 그린 소설집이다. 2020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신예 작가의 첫 책으로,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 채운 자신만의 ‘유니버스’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런데 이 초대를 받은 독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일을 겪은 소설 속 인물들의 반응이 너무나 덤덤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호들갑이란 없는 단어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식물이 된 아버지를 발견해도, 필요로 하는 게 물과 빛밖에 없기에 “생전의 아버지보단 훨씬 편리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느 날 내가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을 때 갑자기 베란다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물. 나는 깜짝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뭐야 이러면 살아 있을 때랑 똑같잖아, 하고 투덜거리며 컵에 찬물을 반만 떠다가 화분에 갖다 부었고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 잎을 천천히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빨간 열매’)

어느 날 갑자기 브로콜리로 변한 손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저 “아이구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겠는걸”이라고 안타까워하거나, “손이 브로콜리가 되었을 때는 내과일까 외과일까” 궁금해하는 정도다. 이구아나가 대뜸 말을 걸어와도 “이구아나 나이로는 몇 살인지 몰라” 존댓말을 해야 할까 반말을 해야 할까 고민한다.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 304쪽. 1만4,000원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 304쪽. 1만4,000원

이런 태연한 반응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사실 환상은 별안간 등장해 일상에 균열을 내는 불청객이 아니라 그 순간 꼭 나타나 주었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브로콜리 펀치’에서 복싱 선수의 손이 브로콜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은, 미워하지 않는데도 죽기 살기로 상대를 때리느라 억지 미움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손이 브로콜리로 변하고 나자 그는 더 이상 화를 낼 필요가 없어진다.

‘치즈 달과 비스코티’에서 주인공에게 돌멩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순간은 학교폭력에 맞설 용기가 필요했던 때다. ‘나를 집어 던지라’는 돌멩이의 목소리에 따라, 소년은 처음으로 가혹한 괴롭힘에 맞서 싸운다. ‘손톱 그림자’에서 주인공이 손톱에 빙의된 채로라도 죽은 연인과의 대화가 필요했던 까닭은, 그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구아나와 나’에서 화자 역시 전 남자친구가 두고 간 이구아나와 소통을 통해 ‘버림받았다’는 비참함과 상실감에서 조금씩 벗어날 힘을 채운다.

초자연적인 사건과 비일상적인 존재의 등장이 아니고서는 건너뛰기 힘든 문제들이 있다. “나쁜 것들을 맘속에 오래 넣고 있다 보면 사람이 버틸 수가 없어”서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생긴 “인간 마음에 엉킨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강력한 환상의 힘이 필요하다. 소설은 환상을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초능력 같은 거”라고 말한다. 그 초능력의 힘을 빌려 슬픔과 고통의 순간을 껑충 뛰어넘는다. 그런 환상 하나쯤 일상에 구비해 두고 싶은 독자라면, 이 작가의 초대를 기꺼이 수락하면 될 것이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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