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윤형근의 기록' 기념 전시
PKM갤러리서 11월 14일까지
“내 그림은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 소리를 그린다. 화폭 양쪽에 굵은 막대기처럼 죽 내려긋는다. 그러나 한 번에 그려지지는 않는다. (중략) 물감도 엄버(다색)와 울트라마린(남색) 두 색만을 쓴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윤형근(1928~2007)은 1977년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썼다. 그의 그림은 ‘천지문(天地門)’으로 명명되는데, 이에 대해 그는 “청색은 하늘이고 다색은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구도는 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림에서 어두운 빛깔을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1973년 이후다. 유신체제 하에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했던 윤형근은 부정 입학한 재벌가 자제의 비리를 따져 묻다 이후 고초를 겪는다. 마포 등에 내려 그은 검은 기둥에서 작가의 분노가 느껴지는 이유다.
서울시 종로구 PKM갤러리서 윤형근 화백의 전시 ‘윤형근의 기록(11월 14일까지)’이 진행 중이다. 그가 메모, 서신 등에 남긴 기록을 엮어 만든 최초의 단행본 발간을 기념해 마련된 전시다. 전시장에는 스케치북 등에 그린 드로잉과 회화 작품 등 총 50여점과 메모, 서신의 일부가 전시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앙데팡당전에 출품됐던 ‘청다색(1977년)’ 등 회화 3점을 제외하면 모두 최초로 공개되는 것들이다. PKM갤러리 관계자는 “작가 본인이 직접 남긴 기록은 작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좋은 예술에 대한 고민, 외아들에 대한 사랑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2층에 전시된 그의 드로잉에서는 창작에 대한 고뇌가 엿보였다. “가득 차면 답답하고 텅 비면 심심하고 심겁고(싱겁고). 이것도 저것도 다 좋을 수가 없구나. 무(無)에서 유(有)를 그린다는 것 이다지도 어렵구나.” 1999년 8월 7일, 그는 스케치북 왼쪽에 커다란 네모를 연필로 까맣게 색칠한 후 오른쪽 한 편에 이렇게 적었다.
하루에 있었던 일, 생각, 느낌 등 그의 기록을 옮겨 놓은 책에서는 인간 윤형근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장인이었던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가 작고한 후 느꼈던 허망함 등이 잘 나타나있다. 이우환, 김창열, 박서보 등 한국 화단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던 삶을 엿보는 재미도 있다. 아들 윤성열씨는 책에서 “작가이기 전에 진솔한 삶을 살아가시려 했던 아버지의 인품이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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