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길 위의 천국' 초연하는 재독 작곡가 박영희·지중배 예술감독
박영희(76) 재독 원로 작곡가는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한국 고유의 음악을 알리며 '제2의 윤이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2005년 음악 인생에서 전환점을 맞았다. 10년에 걸친 그리스 오이디푸스 신화에 관한 오페라(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 초연 '달그림자') 작곡을 끝마치던 때였다. 장구한 작업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에 박 작곡가는 서둘러 다음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주제는 인간의 겸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책 한 권을 읽게 됐다. 한국의 두 번째 천주교 사제인 최양업(1821~1861) 신부가 스승에게 보낸 편지를 정리한 서한집이었다. 서거하기 직전까지 하루 100리(40㎞)를 걸어 다니며 방방곡곡 민중의 삶을 보살핀 최 신부의 삶이 담긴 서한집은 박 작곡가에게 충격을 남겼다. 그 길로 '주님, 보소서(Vide Domine)' 등 최 신부에 관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박 작곡가는 "불과 200년 전 이토록 위대한 업적을 남긴 우리 선조를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며 "나부터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박 작곡가는 2006년 최 신부의 기념관이 있는 충북 진천 배티성지 방문을 시작으로 본격 작곡에 돌입했다. 박 작곡가의 신념을 높이 평가한 한국 천주교 측은 최 신부를 기리는 오페라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15년이 흘러 최 신부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올해 11월 청주(12, 13일) 서울(20, 21일) 광주(23일)에서 '길 위의 천국'이 초연된다.
최 신부는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한국인 최초로 서양음악을 공부한 음악인이기도 했다. 그는 서양음악에 우리 고유의 가락을 붙인 천주가사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동서양의 조화를 꿈꿨다. 박 작곡가가 평생 추구했던 가치와도 상통한다. 박 작곡가는 최 신부에 대해 "그 시절부터 이미 현대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는데, 음악이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삶을 계몽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고 믿으셨다"고 말했다.
박 작곡가가 만든 '길 위의 천국'의 노래들은 오케스트라 연주로 이뤄지지만 "한국만의 가락"을 담았다. 대표적으로 서양의 화성에서 탈피한, 말하는 듯한 선율이 주를 이룬다. 박 작곡가는 "화성학의 근간을 이루는 3화음과 피아노 반주를 배제한 성악가들의 노래를 창작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이 때문에 오페라는 연극적인 느낌도 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페라 지휘를 맡은 지중배 예술감독은 "음악적 표현이 많았던 박영희 선생님의 기존 작품과 달리 이번 오페라 곡은 '여백의 미'가 두드러진다"며 "절제된 음악을 통해 삶의 드라마가 강조될 것"이라고 했다.
최 신부의 삶은 팬데믹 시대에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박 작곡가는 "최근 2년간 세상은 사람들에게 '서로 가까이하지 말라'며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배척해 왔는데, 낮은 자세로 남을 껴안았던 최 신부의 삶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가치를 일깨워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 작곡가는 "나는 종교음악 작곡가가 아니라 종교를 주제로 곡을 쓰는 사람"이라며 "'길 위의 천국'은 현 시대의 우리 모두에게 바치는 음악"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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