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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가 준 뜻밖의 선물...그날 나는 다시 시인이 됐다

입력
2021.11.02 17: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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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김기준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대학병원 교수입니다. 마취 의사이며, 세부전공은 산과 마취입니다. 나는 늦깎이 시인이기도 합니다. 2016년 4월 ‘월간 시’가 주최한 제7회 추천 시인상 공모에 당선돼 공식 등단했습니다. 중1 때부터 시를 썼지만, 쓰다 태우기를 반복한 탓에 모아둔 시는 거의 없었습니다. 나는 윤동주를 닮고 싶었습니다. 평생 단 한 권의 유작 시집만을 남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시를 발표하게 하고, 등단까지 하게 하고, 좋든 싫든 시집을 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습니다. 마취가 나의 소명임을 비로소 가슴에 각인하게 된 사연이기도 합니다.

7년 전 늦가을 저녁이었습니다. 쉰이 넘은 중년 남자가 으레 그렇듯, 모든 것이 권태롭고 의미를 찾기 힘들었던, 유난히 중증 환자와 보직과 관련된 일이 많아 몸과 마음이 다 지쳐버린, 그런 날의 저녁이었습니다. 일과를 끝내고 퇴근을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어오세요.”

감색 원피스에 단정한 매무새의 30대 초반 여성, 의료기기 회사 직원의 방문을 꺼리는 나는

“지금 퇴근하려 하는데요. 다음에 오시면…”
“혹시 김기준 교수님 맞으세요? 여기저기 물어서 찾아왔는데...”
“예. 맞습니다만 무슨 일로 저를?”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의료기기 회사 직원은 아닌데, 그렇다면? 당시 나는 병원 적정진료실 실장을 맡고 있던 터라, 직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환자 안전사고 관련으로 온 건가!

“일단, 여기 앉으세요. 차 한 잔 가져올게요.”

이를 어쩌나. 가슴에 차오르는 짜증과 한숨.

“혹시 저 기억나세요? 몇 개월 전 교수님께서 마취해 주셨는데요. 아기 낳을 때 손잡아 주셨잖아요. 저 때문에 손에 상처가 생겨 피가 났었는데...”

”아! 그때…“

제왕절개 수술을 할 때, 일반적으로 척추마취를 시행합니다. 또 태아 활력징후의 안정을 위해 마취 전 투약은 하지 않습니다. 딱딱한 침대 위에서 척추마취 시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산모가 불안해하고 긴장하는 것은 늘 보는 일입니다. 아기가 태어나고 진정제를 투여받고 잠들 때까지, 산모는 의료진의 다급한 목소리와 움직임, 수술기구들이 부딪히는 차가운 금속성 소리, 피부와 살을 찢는 소리를 온몸으로 듣고 느낍니다. 아마도 이만큼 두렵고 무기력하며 절절한 순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산소 캐뉼라를 산모의 코에 거치한 다음, 그저 손만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해보세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대개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눈을 감습니다. 이렇게 산모가 조금 안정되면,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죠.

“이제 좋은 시절 다 지나갔네요. 배 안에 있을 때가 편안한데... 아기 이름은 지어 놓았나요? 아기방은 어떻게 꾸몄어요? 키우려면 돈 많이 들 텐데…”

그렇지만, 내 손을 잡은 산모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때 죄송했어요. 제가 손톱으로 너무 세게 눌러 교수님 손에 피가 났었잖아요.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알러지 때문에.”

“그때도 그러셨어요. 나이가 들어 갑자기 없던 피부 알러지가 생겼다고. 그때는 교수님 손만 보였어요. 이 손만 꼬옥 잡고 있으면, 놓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사히 다 지나갈 것이다… 오직 그런 마음뿐이었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무슨 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오히려 제가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그는 핸드백에서 곱게 포장한 무언가를 내어놓았습니다.

“교수님, 제 성의입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세요. 그때 없던 알러지가 생겼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피부 알러지에는 모유로 만든 비누가 최고예요. 제가 취미로 비누를 만들거든요. 이건 제 아이가 먹고 남은, 초유로 만든 비누예요.”

“예? 그게 무슨?”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그는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갔고, 난 얼떨떨한 나머지 잘 가라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예쁘게 포장한 작은 상자를 열어보니, 아기 손바닥만 한 황톳빛 비누 두 장이 있었습니다. 한동안 ‘이게 무슨 일이지?’ 어안이 벙벙하고, 꼭 꿈을 꾸는 듯. 얼마나 흘렀을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끝내는 통곡이 되어 눈물, 콧물 다 쏟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습니다.

그날 저녁, 연구실에서 단숨에 눈물로 쓴 글이 ‘비누 두 장’이란 시입니다. 나의 첫 시집에 실려 있으며,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시입니다. 이런 가을날 저녁이면 그가 생각납니다. 나의 닫힌 마음을 두드려 눈물 흘릴 수 있게 만들었고, 다시 시를 쓸 수 있게 만들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의사가 될 수 있게 한,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따스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 사람. 언제까지나 행복하시길 빕니다. 그때 제대로 하지 못한 감사의 인사를 다시 한번 더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습니다.

(그 비누 한 장을 써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한 달 만에 손등의 피부염과 가려움증이 없어졌습니다. 나머지 한 장은 곱게 다시 포장한 후, 깊숙한 곳에 내 평생의 보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누 두 장>

여리디 여린 당신의 허리춤에 긴 마취침 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의 눈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손잡아주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그 순한 눈매에 맺혀오는 투명한 이슬방울

산고의 순간은 이토록 무섭고 외로운데
난 그저 초록빛 수술복에 갇힌 마취 의사일 뿐일까?
사각사각 살을 찢는 무정한 가위 소리
꼭 잡은 우리 손에 힘 더 들어가고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편히 감는 눈동자 속에 언뜻 스쳐간 엄마의 모습

몇 달 후 찾아와서 부끄러운 듯 내어놓은
황톳빛 비누 두 장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아기 먹다 남은 초유로 만든 비누예요
그때
손잡아 주시던 때
알러지로 고생한다 하셨잖아요

혼자 남은 연구실에서 한동안 말을 잊었네
기어코 통곡 되어 눈물, 콧물 다 쏟았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습니다


연세대의대 세브란스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연세대의대 세브란스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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