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브랜드 '하을량' 대표 김깨비탈
'놀면뭐하니' 유야호가 입어 화제된 한복 제작
한복 일상화 위해 기성복과 한복 접목해 디자인
한복은 변화하는 중...기준 고집할 필요 없어
"너무 떨려서 진짜 팬티 세 번 갈아입은 것 같아요"
올여름 큰 인기를 끌었던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뭐하니?' 속 유재석의 부캐 유야호의 한복 슈트를 디자인한 김깨비탈(김깨비)씨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당시의 놀란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흔히 한복하면 떠오르는 전통 문양의 자수와 원단, 저고리 형태와 현대적 슈트가 만난 유야호의 슈트는 한복의 멋과 세련됨을 모두 담아내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유야호는 부채, 머리의 전통매듭, 신발 등 디테일한 소품으로 한국의 멋을 뽐냈다. '한국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힙스터'라는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그가 입은 한복이었다.
누리꾼들은 "제가 본 남자 연예인들 퓨전 한복 중 가장 스타일리시하다" "한복 재킷 너무 고급지고 예쁘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도대체 어느 회사에서 누가 만들었는지 정보를 찾아나섰다.
전통 문양의 자수와 고급스러운 원단의 재질, 색감 등에서 수십 년 동안 한복 외길만 걸은 한복 장인의 솜씨로 예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디자인한 사람은 장인도, 원장 선생님도 아닌 1995년생 스물여섯 청년 디자이너였다.
반전의 주인공이자 유재석이 선택한 한복 디자이너 김깨비(본명 김민영)씨를 만나봤다. 현대와 전통의 조화를 보여주는 한복 브랜드 '하을량'을 경영하고 있다. 전통 문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업(業)으로 삼게 된 '요즘 사람'인 그에게 '요즘 한복'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12년 만에 이뤄진 소년의 꿈
"사기꾼이나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어요 진짜"
깨비씨는 지난봄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를 받았다. 유재석의 스타일리스트였다. 처음 제안을 받은 순간을 떠올리는 그의 목소리가 두 톤 정도 올라갔다. "유재석님께 방송에서 꼭 입혀보고 싶은데 혹시 협찬이 가능하냐"는 제안에 깨비씨는 꿈만 같아 믿기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제가 열다섯 살 때 자장면 먹으면서 무한도전 보는데 '유재석님한테는 무조건 내가 만든 옷을 꼭 협찬해야겠다'고 다짐했거든요. 그걸 12년 만에 이룬 거죠."
그렇게 '성덕(성공한 덕후)'이 된 깨비씨의 협찬 꿈은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아직 방송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스타일리스트가 혹시 다음에도 (협찬이) 가능하냐고 제안했다. 그는 "유재석님도 한복 슈트를 맘에 들어 하셔서 또 입고 싶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라며 활짝 웃었다.
깨비씨에게는 말 그대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는 당시 새로운 디자인으로 처음 제작된 재킷을 보냈고, 촬영 때 입고 나오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유재석은 '놀면뭐하니'에 하을량의 한복 슈트 세 벌을 입고 나왔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한복 슈트를 사고 싶다는 문의가 크게 늘었다. 준비된 원단 재고가 바닥나 다른 원단으로 바꿔 제작해야 했다.
다른 연예인 스타일리스트들로부터 연락이 많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홍보 효과만 보고 협찬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깨비씨는 "하을량의 슈트나 재킷은 원단 특성상 손바느질이 많이 필요하고, 자수도 많아 공임비와 시간이 많이 든다"며 "그렇다 보니 현실적으로도 감사한 제안을 전부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요즘엔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디자인한 한복 입는 순간 "내 인생 이제 시작" 느껴
김깨비씨는 원래 양궁 유망주였다. 그는 "하지만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으며 10년 동안 잡았던 활시위를 내려놨다"며 "사실 중학생 때부터 옷을 너무 만들고 싶었는데도 양궁을 너무 잘해서 그만두지 못했는데 이때다 싶었다"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는 오랜 꿈에 도전하기 위해 열여덟에 혼자 고향 전남 여수를 떠나 서울에 왔다. 처음엔 자신이 생각해도 촌티가 너무나서 고생했다는 그에게서 어렴풋이 전라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서울에서 디자인 학원을 다니며 처음 만든 두루마기와 도포가 그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그는 "평소 좋아하던 슈트 위에 도포를 입어보니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리고 멋있었다"며 "내 인생은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라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그는 두루마기, 갓, 저고리 등 다양한 한복과 일상복을 함께 입으며 '한복과 놀기' 시작했다. 어딜 가도 눈에 띄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주목을 끌기 충분했다.
SNS 등을 통해 입소문이 나면서 "이런 옷은 어디서 살 수 있냐", "나도 사고 싶다"는 호평이 쏟아졌고,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은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는 "함께 한복 알리미 활동을 하는 '한복져스' 팀원들이 빨리 브랜드를 내보내라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쪼아댔다"며 "(온라인에) 첫 펀딩을 시작할 때 모두 많이 도와줬다"고 공을 돌렸다.
깨비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 크며 자연스럽게 전통 문화를 많이 접했다. 할머니의 자개장과 자주 입으시던 한복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국의 멋 속에서 자랐다. "맞지도 않는 할머니의 한복을 혼자 입어보고, 장독대를 깨고 할머니에게 혼나고 했죠." 그러면서 마음 깊은 곳에 전통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나 연날리기 같은 놀이, 아무튼 옛날 느낌 나는 것들을 유독 좋아했어요. 거기서부터 시작됐던 것 같아요."
자개장과 전통문양 속에서 자란 그에게 한국의 전통문화는 일상이자 당연한 것이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당연한 우리의 것으로 체화되어 살아왔다. 그러나 그가 처음 마주한 서울은 달랐다. 그는 "저는 당연하게 모든 집들에 다 자개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서울에선 보기 힘들더라고요"라며 "매일 보던 걸 못 보게 되니 왠지 신경이 쓰이고 그러다 보니 일부러 더 찾게 됐죠"라고 말했다.
한복으로 유명세, 관심 받아 즐거워
깨비씨는 한복을 통해 받는 관심과 시선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했다. "SNS에 한복 입은 사진을 올리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는 게 기분이 좋더라"라는 그는 "관종(관심종자)의 삶이 저랑 잘 맞나 봐요"라며 유쾌함을 놓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 기분 좋은 관심만 따라온 것은 아니다. 남들과 다른 특이한 스타일과 눈에 띄는 한복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따라붙기도 한다. 깨비씨는 길거리에서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자신에게 욕을 하거나 수군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별로 신경을 안 쓴다"며 "내가 입고 싶어서 입었고 내 눈에는 멋있기만 한데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하고 무시해요"라고 받아넘겼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한복으로 유명했다. 개성 넘치는 학생들이 모인 패션 스쿨에서도 그의 독특한 한복 스타일은 관심 끌기에 충분했다. 그는 기성복과 한복을 어울려 입고 캠퍼스를 누볐다. 깨비씨는 "학교에서 한복을 입고 걸어가면 뭔가 사람들 시선이 느껴지는데 나는 그런 관심이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엔 학교에서 질문 세례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게 뭐냐, 한복이냐, 너무 예쁘다, 어디서 샀냐 등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신기해하더라고요." 그의 한복 사랑을 한눈에 알아본 한복 동아리에서는 스카우트 제의도 했다. 그는 "거의 입학하자마자 사람들이 저를 이름보다 걸어 다니는 선비, 부채남, 한량으로 불렀어요"라며 오히려 SNS에 올라와서 더 유명해지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졸업식에도 곤룡포를 입고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햇수로 4년이 지났지만 그의 한복 사랑과 스타일은 아직까지 학교에 전설로 남아 있다.
그의 유명세는 고향 여수에까지 퍼졌다. 그는 "고향에서 인기가 많아졌다"며 뿌듯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친하지도 않은 동창들이 소식을 듣고 먼저 연락이 온 적도 많다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통해 친구들이 한복에 관심을 갖게 되어 가장 기쁘고, 한편으로는 신기하다고 했다. 지인들이 SNS를 통해 그의 근황을 보던 중 그가 올린 한복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입어볼까 하고 도전한 친구들도 있고, 전통 한복에도 관심을 갖게 된 친구도 있다고 한다.
학교에 특강을 나간 뒤 학생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10대 학생들은 깨비씨가 입은 한복을 보고 '이게 한복이야?'라며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고 한다. 실제로 관심이 구매로 이어지기도 했다. 직접 SNS에 검색을 해 메시지로 '이게 맞냐'고 확인한 뒤 주문을 한 것이다. 그는 "어린 학생들이 직접 막 알아보고 샀을 걸 생각하니까 괜히 더 뿌듯했다"며 "귀여운 햄스터를 새끼 때부터 키워서 다 키운 느낌이어서 이런 게 선생님의 마음인가 싶었다"며 즐거워했다."
"이렇게 예쁜데 왜 안 입지?"에서 시작된 한복의 일상화 시도
깨비씨는 한복이 대중의 일상 속에 녹아 들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워 진입 장벽을 낮추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다. "제가 일본 여행을 가서 보니 축제나 일상에서도 기모노, 유카타를 많이 입고, 다들 당연하게 생각하더라고요"라며 "반면 한복을 입으면 어디 가서 공연하나, 코스프레냐 물어보는 게 속상했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도 한복이 예쁘지만 일상에서는 접하기 힘들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자칭 '한복 덕후'들이 모여 만든 '한복져스'로 활동하며 한복의 대중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한복을 입고 여행 가거나 한옥 체험을 하는 등의 콘텐츠로 대중이 한복을 친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한복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복져스는 충남콘텐츠코리아랩에서 콘텐츠 제작지원 대상으로 뽑혔다. 최근 '오방색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인 오방색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며 각 색에 맞는 다채로운 한복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그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비영리단체 전통문화 프로젝트 그룹인 '한복여행가'에서도 활동 중이다. 삼일절 백주년을 기념한 만세운동 플래시몹에 참여하는 등 한복과 역사 문화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그는 자신의 눈에 예쁜 한복을 왜 안 입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평소 입는 옷에 한복을 접목시키는 디자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틀에 박힌 '옛날' 한복이 아닌 새로운 스타일의 한복을 만들려는 시도였다. 깨비씨는 "생활 한복의 형태가 다 똑같았고, 틀에 박혀 있는 것 같았다"며 "예쁜 전통 문양이 많은데 왜 사용을 안 할까 의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일상 속에서 선뜻 입기 어려운 저고리나 두루마기 대신에 일상복에 의미 있는 전통 문양을 차용해 만든 옷이 쌍학흉배 디자인이다.
쌍학흉배는 조선왕조와 역사를 함께한 단령관복 중 문관을 상징하는 날짐승흉배의 하나이다. 조선 최고의 지성들이 국사를 돌볼 때 입었던 관복 속 흉배를 21세기, 하을량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청재킷과 후드티 등에 쌍학흉배 자수를 새긴 그의 첫 디자인은 펀딩 1,000%를 달성하는 큰 성공을 거뒀다.
상품 설명에는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 사람만의 멋이 있다"는 문장이 가장 위에 있다. 이 밖에도 한복 코트, 양반탈 트렌치 코트, 한복 슈트 등의 디자인을 선보이며 현대 기성복과 전통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깨비씨는 "우리의 전통은 이렇게 입어도 멋있고 힙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이 옷을 통해 한복에 관심을 갖게 돼서 전통 한복을 맞추겠다는 분들도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브랜드 옷뿐 아니라 한복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날이 갈수록 일상에서 한복을 입는 것에 대중들의 거부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고.
"(한복져스) 팀원들과 항상 한복 관련 기사를 공유하며 함께 호들갑 떨며 좋아한다"며 "유명한 사람들이 한복을 입어 반응이 좋으면 괜히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스타일의 한복 브랜드를 통해 일상 속에서 한복을 편하게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변화하는 한복을 재미있게 전달하는 광대되고파
깨비씨는 어디까지를 한복으로 봐야 하냐는 논란을 두고 한복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고 답했다. 과거에도 한복의 변형하고 개량하려는 시도를 반발하거나 전통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한복은 바뀌었다. 앞으로도 한국 사람들의 달라진 일상에 맞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복의 모양새는 계속 바뀔 것이라 굳이 기준을 둘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깨비씨는 "한복을 입으면 또 다른 내가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스스로 자신감을 얻고 싶을 때 한복을 통해 더 멋진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 디자인부터 제작, 판매 등을 모두 총괄하는 그는 브랜드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라고 설명했다. 브랜드 이름인 '하을량' 또한 한복을 입고 다니는 자신에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인 한량에서 탄생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담긴 브랜드를 통해 대중에게 전통문화의 멋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제가 한복의 멋을 자유롭게 즐기는 것처럼 대중이 전통문화를 부담스럽지 않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게 제 스스로가 광대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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