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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싱글맘, 청소일을 시작했다

입력
2021.10.23 10:0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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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넷플릭스 ‘조용한 희망’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넷플릭스 '조용한 희망'은 가정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사 도우미가 되는 싱글맘 알렉스의 이야기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조용한 희망'은 가정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사 도우미가 되는 싱글맘 알렉스의 이야기다. 넷플릭스 제공

내 인생의 첫 기억은 사건이라기보다는 풍경이다. 내가 세 돌, 한국 나이로 네 살이 되기 직전에 살았던 연립의 한 칸짜리 지하 방으로 내려가는 시멘트 계단을 비추던 봄볕을 기억한다. 그 연립 주변을 돌며 주소지를 끊임없이 옮기던 서너 해 동안의 기억은 꽤 많은데, 그중 유난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한겨울, 많아도 여덟아홉 살 정도 되었을 어린 남자아이가 연립의 바깥 계단에 서 있다. 팬티 한 장만 입고 있고 선 아이의 발이 얼어서 새빨갛다. 엄마는 그 아이를 잠시 우리 집에 데려가려고 하지만, 아이는 아버지에게 혼난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고, 가끔 아이의 엄마가 함께 나와 있는 걸 본 적도 있다. 그 풍경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언젠가 엄마에게 그 일을 기억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 시절에 그런 일은 흔했다고 했다. 그보다 더 전에는 벌거벗은 채로 쫓겨났던 어떤 여자와 아이를 숨겨준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혼잣말에 엄마가 대답했다. "돌아갔겠지?"

정말로 그랬을까? 가정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평균 일곱 번, 다시 가해자가 있는 공간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조용한 희망'이 알려준 통계다. 함께 살던 남자친구가 딸을 안고 있던 자신의 머리 쪽으로 유리컵을 던진 밤, 알렉스(마거릿 퀄리)는 세 살배기 딸을 안고 무작정 집을 나온다. 머물 곳도, 믿을 만한 사람도, 돈도 없다. 사회복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복지사는 가정 폭력을 당했는지 묻는다. 알렉스는 주저한다. 내가 당한 일은 어떤 일이지? 내 경험은 어떤 단어로 이름 붙일 수 있지? 지난밤의 일이 '진짜 학대'는 아니라고 말하는 알렉스에게 복지사가 다시 묻는다. "가짜 학대는 뭐죠? 위협? 협박? 조종?" 자기에게 벌어진 일이 본능적으로 위험한 일인 것을 감지했지만, 이를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할 말도 찾지 못하는 알렉스에게, 복지사는 해야 할 말을 알려 준다. "도와주세요."


알렉스는 딸 매디에게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만들어주려 애쓴다. 넷플릭스

알렉스는 딸 매디에게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만들어주려 애쓴다. 넷플릭스

'조용한 희망'은 가정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한 젊은 여성이 "도와주세요"라고 말한 그날 이후로부터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 날까지 경험한 일을, 세상을 담은 작품이다. 청소는 대학 졸업장도 경력도 없는 여성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타일 사이 낀 때를 지우는 방법을 유튜브 영상으로 찾아보면서, 알렉스는 딸과의 생존을 위한 지난한 싸움을 시작한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온갖 서류를 제출해야 겨우 받을 수 있는 빈곤층 지원금에 일로 번 급여를 더해도 월말에는 겨우 생리용품을 살 수 있는 돈만 남는데, 이 돈으로는 당장 내일조차 계획할 수 없다.

숨통을 조여오듯 무서운 속도로 줄어드는 돈, 가정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고 회로가 마비되는 상황, 피해자인 것과 빈곤을 증명해야 하는 정부 지원 제도의 허점, 이들을 안전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부실한 사회 안전망의 묘사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는 '조용한 희망'의 원작이 르포르타주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스테퍼니 랜드는 6년 동안 가사 도우미로 일했고, 한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뒤 작가가 되어 자신의 경험을 글로 썼다. 그 책이 바로 '조용한 희망: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찬란한 생존의 기록'이다. 드라마에서 알렉스가 어디에나 들고 다니는 노트에 써나가는 이야기가 이 책이 되었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보면, 이 작품이 묘사하는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좀 더 단단하게 붙는다.


이 작품은 6년간 가사도우미로 일한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쓴 스테퍼니 랜드의 베스트셀러 '조용한 희망: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찬란한 생존의 기록'에서 영감을 얻었다. 넷플릭스 제공

이 작품은 6년간 가사도우미로 일한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쓴 스테퍼니 랜드의 베스트셀러 '조용한 희망: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찬란한 생존의 기록'에서 영감을 얻었다. 넷플릭스 제공

영상화가 되며 다양하게 더해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빈곤과 폭력의 대물림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자신 또한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엄마는 심각한 조울증과 충동적인 행동으로 안 그래도 버거운 알렉스의 삶에 계속 문제를 더한다. 딸의 생부인 전 남자친구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했고 그로 인해 중독 문제가 생긴 피해자면서, 지금 알렉스와 딸을 학대하는 가해자다. 그래서 딸이 다시는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게 하려는 알렉스의 분투는, 단순히 위대한 모성으로 요약될 수 없다. 알렉스는 자신의 대에서 빈곤과 학대의 지독한 고리를 끊어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아주 작은 행복 후에 이 모든 걸 뒤덮어 버리는 불행을 맞아야 하는 알렉스가 더 나은 삶, 새로운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는 건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다. 몇 번이고 가해자의 곁으로 돌아가듯, 빠져나온 듯해도 다시 끌려 들어가는 깊은 구덩이 깊은 곳에는 소리마저 잘 닿지 않는다. 이런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당겨 주는 건 또 다른 여자들이다.


알렉스는 남자친구 숀의 폭력으로부터 탈출해 자신의 대에서 빈곤과 학대의 지독한 고리를 끊어내고자 한다. 넷플릭스 제공

알렉스는 남자친구 숀의 폭력으로부터 탈출해 자신의 대에서 빈곤과 학대의 지독한 고리를 끊어내고자 한다. 넷플릭스 제공

이 작품의 가장 좋은 점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으며 알렉스와 다름없이 인간이라 취약한 존재임을 분명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처음 쉼터에 간 날 좌절에 빠져 카펫에 누워 있는 알렉스를 일으켜 세워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게 도와줬던 대니얼은 학대하는 남편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청소 급여를 지불하지 않아서 알렉스를 곤경에 빠뜨렸던 레지나는 대리모를 써서 아이를 가졌는데도 남편과 이혼해야 하는 상황 속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를 돕는다. 대니얼은 알렉스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레지나는 알렉스에게서 작지만 아주 중요한 도움을 받아왔기 때문에. 아이를 달랠 조랑말 인형을 건네는 일이, 육아에서 벗어나 낮잠을 잘 수 있는 30분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일이 때로 사람을 구한다. 알렉스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개인의 인생이 얼마나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지, 인간과 인생이 얼마나 복잡하고 또 요약할 수 없는지를 알아간다. 이들을 만났기 때문에 알렉스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두 약하기에 서로를 돕는 것. 이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위대한 일이고, 조용하게 우리 곁에 있는 희망이다.


'조용한 희망'은 가난한 싱글맘이 자기 자신으로 홀로 서는 과정과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분투를 담았다. 넷플릭스 제공

'조용한 희망'은 가난한 싱글맘이 자기 자신으로 홀로 서는 과정과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분투를 담았다. 넷플릭스 제공

가난한 싱글맘이 자기 자신으로 홀로 서는 과정을,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분투를 전 세계의 시청자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스테퍼니 랜드가 자신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일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여성이 자기 삶의 저자가 되기 위해서는 돈과 방, 그리고 또 다른 여성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용하게 느껴져도 거기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때만, 서로를 돕는 작은 기적이 많아질 수 있다. 알렉스가 겪은 일이 개인에게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면, 벌어진 이후에 만날 세상은 지금보다는 여성과 아이에게 덜 가혹한 곳이어야 한다. 당연히 이는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5년간 교제 폭력이 2배 증가하고,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과 관련한 기사가 잊히기도 전에 반복되는 한국 사회에는 '조용한 희망'이 더욱 필요하다.


가정 폭력 피해자인 알렉스가 딸 매디와 함께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삶의 존엄성을 일깨우고 '조용한 희망'을 품게 한다. 넷플릭스 제공

가정 폭력 피해자인 알렉스가 딸 매디와 함께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삶의 존엄성을 일깨우고 '조용한 희망'을 품게 한다. 넷플릭스 제공

이 작품을 보면서 어린 시절, 새빨갛게 얼어 있던 이웃집 아이의 발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지금이라면 그 아이를 지나치지 않을 텐데. '조용한 희망'의 매회 차 마지막 장면 후에는, 자막이 올라가기 전에 이런 문구가 먼저 나온다. '여러분이나 여러분이 아는 사람이 가정 폭력을 경험했다면 여기서 도움을 구하세요.' 알렉스를 피해자로서, 피해를 극복하고 내 삶을 살아갈 한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게 만든 "도와주세요"라는 말은, 피해자가 도움을 구하는 말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피해를 발견하고 또 눈치챈 사람들이 소리 없이 듣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어렸던 내가 의미를 몰라서, 젊었던 엄마가 방법을 몰라서 마무리하지 못한 도움의 손길을, 다시는 몰라서 건네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조용한 희망'은 그 손길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 한국의 여성긴급전화는 국번 없이 1366이다.

윤이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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