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입은행, UAE·그리스서 금융협약서 체결?
국내 기업에 일감 주면 대출 지원하는 구조?
"한국 수주 가능성 높이는 수출금융의 전환"
한국수출입은행(수은)이 지난 6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국영석유회사(ADNOC)와 체결한 50억 달러(약 6조 원) 규모의 금융협력협약서는 기존 금융권 관행과는 180도 다른 계약이었다.
통상 외국 기업이 한국 기업에 일감을 줘야 국책은행 등이 '공사 대금을 대출해 주겠다'는 약정을 맺는데, 이번에는 ADNOC가 한국 기업에 일감을 주지 않았는데도 공사 대금을 대출해 줄 수 있다는 계약을 먼저 체결한 것이다. 이른바 '선금융 후발주' 시스템이다.
수은이 사무실에 앉아 차주를 기다리는 대신 먼저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서면서 국내 기업이 ADNOC가 발주하는 대규모 건설, 플랜트 공사 수주를 따낼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UAE 6조 잭팟, 건설·플랜트사 일감 따낸다
20일 수은에 따르면 방문규 수은 행장은 지난 6월 첫 해외 출장지로 UAE를 선택, 새로운 형태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2년 가까이 수은을 이끌고 있는 방 행장이 취임 직후부터 앞세운 '선금융 후발주'를 적용한 것이다.
수출금융 전담 국책은행인 수은은 그동안 한국 기업이 해외 투자를 하거나, 해외 발주처로부터 수주를 따내면 발주 회사에 대출을 해왔다. 자금이 필요한 쪽에서 먼저 은행을 찾으면 돈을 빌려주는 전통적인 영업 방식이다. 하지만 방 행장은 대형 프로젝트를 계획하는 해외 발주처를 찾아가 '우리 자금을 쓰라'고 먼저 요청하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단, 한국 기업과 수주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ADNOC와의 협약서 체결은 방 행장이 띄운 선금융 후발주를 처음 접목한 사례다. 당장 ADNOC가 올해 발주하는 사업비 31억 달러의 해상 원유생산시설 전력공급용 해저 송전망사업, 60억 달러의 석유화학 생산시설 건설을 우리 기업에 맡기면 수은 대출을 활용할 수 있다. 덕분에 국내 건설사, 엔지니어링사는 ADNOC 발주 사업을 더 공격적으로 노릴 수 있게 됐다.
"선금융 후발주, 수출금융 패러다임의 전환"
처음 시도하는 계약인 만큼 시행착오도 있었다. 대출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은행이 돈을 먼저 쓰라고 접근하니, 외국 기업 입장에서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수은은 계약 성사를 위해 UAE 권력 핵심부인 왕족 족보를 꿰고 있는 국내 인맥을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이 중 방 행장과 기획재정부 관료 시절 동료이면서 현재 사모펀드 업계에 종사하는 A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동 마당발'로 불리는 그는 과거 UAE 원전 수주, 유전 개발 계획을 최전선에서 성사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수은 측에 최우선 접촉 인사를 족집게로 알려줬다는 후문이다.
ADNOC와의 계약 성공을 토대로 수은이 향한 곳은 해운 강국인 그리스였다. 방 행장은 지난 8일 그리스 최대 해운사인 안젤리쿠시스와 협약서를 체결했다. ADNOC 사례와 마찬가지로 안젤리쿠시스가 발주하는 친환경 선박을 한국 조선사가 수주하면 수은이 돈을 빌려주는 구조다.
현재 그리스 발주 물량은 한국 조선사 전체 수주 잔액의 20%(129억 달러)를 차지할 정도로 국내 기업의 주요 일터다. 수은의 금융 지원은 국내 조선사 수주 확보는 물론, 한국을 추격하고 있는 중국 조선사와의 격차 유지에도 기여할 전망이다.
수은 관계자는 "금융이 먼저 뛰고 한국 기업은 이를 바탕으로 수주를 획득하는 선금융 후발주는 수출금융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며 "한국 국가 신용 등급이 다른 경쟁국보다 높고 세계 각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도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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