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란 무엇인가: 마스크 시대의 정치학' 번역 출간
독일 대중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신간
코로나가 드러낸 독일사회 현주소 진단
미국과 유럽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 대응 실패에 '선진국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확진자 급증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마스크 착용 거부 등 방역 저항이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2년째 이어지면서 정부 방역 조치에 협조적이었던 아시아권에서도 반발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과 유럽은 한발 더 나가 코로나19 백신 의무화, 백신 패스 도입 등을 둘러싼 갈등도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현대사회는 근본적 질문에 맞닥뜨렸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 제한 가능한가. 국가는 왜 과도한 분노의 대상이 됐나.
독일의 대표적 대중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신간 '의무란 무엇인가'를 통해 국가의 방역 조치와 그에 대한 시민의 저항을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 '마스크 시대의 정치학'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책에 따르면 대부분의 전후 세대 독일인은 국가가 시민에게 행동 변화를 강요하는 조치를 코로나19 확산으로 처음 겪게 됐고, 일부는 이를 폭력적이고 당혹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코로나19 문제에서 이 같은 공동체 의식에 대한 반감은 논거가 부족하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는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볼프강 뵈켄푀르데, 카를 마르크스 등을 인용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시민이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국가 가치를 자발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유지된다고 전제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원칙을 허물고 헌법을 무력화하는 상황이라면 예외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보건 조치는 당연히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문제는 극단화한 자본주의다. 경제가 지배권을 행사하는 사회에서는 '성과'가 아닌 '성공'이 주목표가 된다. 사회적 신분 이동의 기회가 줄고, 사회적 신분이 상속을 통해 더욱 공고해지면서 시민 사회의 연대는 시련에 직면한다. 여기에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공공 장소 폐쇄가 이어지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의견만 증폭되는 가상 세계의 '에코 체임버(반향실)'를 찾는다. 저자는 미국사회를 연구한 프랑스 정치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발언을 불러내며 "민주적 시민 의식과 자본주의적으로 배양된 이기심은 서로 충돌한다"고 역설한다.
아울러 국가에 대한 시민의 의무가 줄고 시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가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국가를 서비스 제공자로 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최상의 서비스를 바라는 고객 또는 소비자로 여기는 이들로서는 국가가 기대한 대로 해주지 않으면 공동선의 의무를 내팽개친다는 분석이다.
저자는 '의무란 우리에 대한 타인의 권력'이라는 프레드리히 니체의 말을 언급하며 "의무는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공동체 의식의 미덕을 되살리기 위해 일정 기간 공동체를 위해 주 15시간씩 봉사 의무를 부여하는 '사회적 의무 복무' 도입을 제안한다. 시민들의 '자기 효능감'을 키우고 연대의식을 회복시키려는 목적이다.
코로나19 시대의 '탈의무', '탈연대' 화두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한 책은 국가와 의무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을 넘나들며 시민의 일체감과 연대감을 강조한다.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이 길어지면서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강압적 방역에 대한 불만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지만 공동체 문화를 중시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이 같은 '탈의무' 현상 분석은 아직은 멀게 느껴진다.
다만 코로나19가 사라진 후에도 기후 위기와 여러 감염병 등 지구의 생태적 파산이 이어질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국가의 역할과 시민적 의무를 두고 벌어지는 저항과 반발 문제는 우리에게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토론 의제다.
저자는 "거리두기 규칙과 얼굴에 작은 천 조각 하나 걸치는 것에조차 그렇게 분노한다면 임박한 전 지구적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시민들에게 훨씬 더 강력한 제한과 행동 변화를 요구할 때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는 독일 사회를 향한 일침이지만 "탈의무의 가장 깊은 뿌리는 멍청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타인에 대한 의무를 내팽개치라고 끝없이 가르치는 변화된 우리 경제"라는 지적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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