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1일 오후 5시 반 전남 여수시 웅동 이순신마리나 인근의 스타벅스 앞 광장. 섭씨 18도의 가을 날씨라고는 하나 바닷바람에 체감온도는 10도 언저리를 맴도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어린아이들을 대동한 가족도 있었다.
6일 이곳 마리나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요트 선체에 붙은 따개비 제거 작업을 하다 수중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현장실습 고교생 홍정운(18)군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우산을 쓰거나 비옷을 걸쳐야 했던 날씨지만 오후 6시 본격적인 추모문화제가 시작하자 비는 가늘어졌다. 그사이 모여든 인원은 어림잡아 200여 명. 이들은 종이컵을 끼운 초에 불을 붙이고 낮은 목소리로 외었다. ‘정운아 미안해’ ‘형들이 미안해’ ‘어른들이 미안해’. 내린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을 얼굴에서 훔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이날 열린 추모제는 지역시민단체 등 23개 단체가 참여하는 ‘고 홍정운 현장 실습생 사망사고 대책위’가 주최했다. 이들은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현장실습생 사망사고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행사를 주도한 최관식 민주노총 여주시지부장은 “현장실습의 숱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줄기차게 개선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진 게 하나도 없더니 결국 이 같은 사고가 생겼다”며 “해양경찰, 여수시, 교육청, 노동부 등 관계 기관을 상대로 시민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연대해서 싸울 것”이라고 했다.
이날 자녀 셋을 대동해 거리로 나온 서정애(38)씨는 “숨진 학생과 나이 차가 크지 않은 똑같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이번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나왔다”며 “안전한 학교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또 거리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 전날까지만 해도 함께 뛰놀다 갑작스레 비보를 접한 홍군의 해양과학고 친구들은 ‘아직도 믿기기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오늘 새벽 추위에 잠을 깼다”는 차은이양은 추모사 낭독에서 “모든 일들이 거짓이기를 확인하며 일어나게 되더라”며 “그 춥고 어두운 곳에서 정운이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특히, 차양은 “조금만 같이 지내보아도 정운이가 얼마나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인지 알 수 있는데, 거절을 모르고 주변에 아낌없이 퍼주던, 너무나 착한 정운이가 왜 죽어야 하는지… 믿고 싶지 않다”고 흐느꼈다. 흐느끼는 소리는 모여든 인파 속에서도 들렸다.
더러는 어른들을 향한 불신과 반감을 거칠게 드러냈다. 홍군의 후배 이정운(17)군은 “형이 작업하던 배가 형의 죽음에 시치미라도 떼듯이 며칠 뒤 버젓이 영업을 뛰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다”며 “우리도 실습을 해야 하고, 또 다른 후배들도 계속 현장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진상 규명은 뒤로 한 채 사고 배와 업주는 영업을 계속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군 사망 나흘 만에 영업을 재개했다는 소식에 여론이 들끓자, 선주는 “예약된 관광객은 다른 배로 돌렸지만, 도저히 변경되지 않은 손님이 있어 태웠다”고 밝힌 바 있다. 홍군의 아버지는 "선주가 전화가 와서 '배를 돌리면 안되겠느냐'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며 "너무 기가 막혔서 '알아서 하라고!'고 했더니 결국 손님을 태웠다"고 말했다.
오후 7시부터는 전국특성화고 노동조합 전남지부에서 주최하는 촛불 추모제가 이어졌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2부 행사를 이끈 장정구 전교조 전남지부 위원장도 현장 실습 관련 요구 사항을 발표하며 근본적인 문제해결 때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전남도교육청에 계속되는 현장실습생 사망 사고에 대한 재발방지를 위해 총체적인 대책 마련과 함께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또 이들은 현장실습 관리 감독 부실에 따른 책임자 처벌, 직업계고에 대한 무분별한 학과 개편과 부실 교육과정 운영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창때의 제자 하나를 어이없게 잃은 이들의 분노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어도 고스란히 새 나왔다. 이들은 여수시와 여수고용지청에 대해서도 해양관광레저산업의 영세사업자에 대한 안전 조치 및 특별근로감독, 여수해양경찰에는 철저한 수사와 해양 안전 관리감독 강화를 주문했다. 교육부에 대해서는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학습중심의 현장실습’ 정상화를 위한 계획 수립을 요구했다.
행사에 참석한 한 교사는 “아이가 죽은 지 며칠이 지났다고 사고 선박이 영업에 뻔뻔하게 투입되냐”며 “이번 사건에도 우리 어른들이 제대로 된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선 제자들을 현장실습에 내보낼 수도 없고, 제자들 앞에도 설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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