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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밖에서 시작하는, 오직 나만을 위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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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밖에서 시작하는, 오직 나만을 위한 공연

입력
2021.10.04 13:53
수정
2021.10.04 14:1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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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과 이상의 문학 활용한 국립극단의 '코오피와 최면약' 체험기

국립극단의 '코오피와 최면약' 공연 관객이 서울로7017에서 가상현실(VR) 기기를 착용한 채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이 공연은 극장 바깥에서 시작된다.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의 '코오피와 최면약' 공연 관객이 서울로7017에서 가상현실(VR) 기기를 착용한 채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이 공연은 극장 바깥에서 시작된다. 국립극단 제공

지난 3일까지 열흘간 공연된 국립극단의 '코오피와 최면약'은 여러모로 독특한 공연이었다. 우선 공연장에서 극이 시작하지 않았다. 관객은 서울 회현역 근처에 있는 서울로7017안내소로 가야했다. 그곳에 대기 중인 극단 직원의 안내에 따라 스마트폰을 음성 콘텐츠에 연결한 뒤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서울로7017 길을 걷는 것으로 작품이 시작됐다.

이어폰에서는 배우의 독백이 흘러 나왔다. 대사들은 대부분 작가 이상의 시와 소설들에서 발췌된 것들이었다. 예컨대 서울로에서 서울역 건물이 보일 무렵 '여러 번 자동차에 치일 뻔하면서 나는 그래도 경성역을 찾아갔다'(소설 '날개')라는 대사가 나오는 식이다. 즉, 문학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이상이 활동했던 1930년대 서울(경성)을 여행하는 설정이다.

관객은 대사를 들으며 약 35분간 1.1㎞길이의 서울로 길을 산책하게 된다. '날개'를 비롯해 '삼차각설계도' '1933, 6, 1' 등 작품이 대사에 활용됐는데, 이상 특유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 때문에 제목처럼 최면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익숙했던 서울역 일대 풍경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본보 장재진 기자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VR 기기로 '코오피와 최면약'을 관람하고 있다. 오직 한 명의 관객을 위한 공연이다. 국립극단 제공

본보 장재진 기자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VR 기기로 '코오피와 최면약'을 관람하고 있다. 오직 한 명의 관객을 위한 공연이다. 국립극단 제공

산책의 종착지는 서울역 뒤편 서계동에 있는 국립극단의 백성희장민호극장이다. 그곳에서 극의 2부가 펼쳐진다. 관객은 텅 빈 무대 앞 객석에 앉아 극단이 제공하는 가상현실(VR) 기기를 착용한 채 남은 작품을 감상한다. 배우나 다른 관객이 전혀 없는 공간에서 나홀로 공연을 관람한다는 점에서도 '코오피와 최면약'은 이례적이다. 자리에서 VR 기기 속 화면을 응시하던 관객은 시간이 지나 무대 방향으로 걸어 나가 돌아다니며 커피가 아닌 '코오피'를 마셨던 해방 전 서울을 가상 공간에서 구경하게 된다. 축음기에서 흘러 나왔을 법한 근대 가요가 흘러나오며 작품의 복고풍을 더했다.

'코오피와 최면약'은 10여 년 전부터 1인 관객을 위한 작품들을 만들었던 서현석 작가가 구성, 연출했다. 그는 이 같은 관람 방식을 설정한 이유에 대해 "관객들이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나의 경험에 직면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동선에 맞는 이동 시간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관객이 어떤 풍경을 바라보며 작품을 감상할지는 자율에 맡긴다. '이머시브(Immersive·참여형) 공연'의 본래 취지를 잘 살렸다.

다만 눈 앞의 무대에서 배우가 실연하는 공연이 아니라서 전형적인 연극에 익숙했던 관객이라면 당황할 수 있다. 특정 서사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공연이 아닌 탓에 낯선 체험이 누군가에겐 난해함으로만 남을 여지도 있었다. 게다가 30분 단위로 한 명씩 관객을 받는 구조여서 하루에 관람 가능한 인원은 평일 16명, 주말 22명 수준이었다. 태생적으로 표 구하기가 쉽지 않은 공연이었다.

그럼에도 VR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해 관객 주도형 콘텐츠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었다. 프로시니엄(액자형 무대)에 갇혀 있던 공연의 정형성을 깨고, 공연의 개념을 극장 바깥에서 재정립한 것도 의미 있었다. 특히 비대면이 요구되는 팬데믹 시대에 최적화된 공연으로도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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