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중재자’ 역할을 앞세워 북미 비핵화 협상을 견인해온 문재인 정부의 운신 폭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북한의 뚜렷한 비핵화 조치와 이에 대한 미국의 보상 사이에서 절충점을 모색했지만, 최근 흐름은 북한이 먼저 무력 도발 수위를 높이며 선택을 강요하는 탓에 미국을 설득할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의 발언은 중재 역할에서 멀어진 정부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잘 대변한다. 정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공개된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현 상태가 계속되면 북한 미사일 능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조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종전선언 등과 같은 구체적인 안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내심 미국이 먼저 협상 유인책을 내놓기를 기대한 것이다. 1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그는 “이제는 (대북)제재 완화를 검토할 때가 됐다. 북한이 대화에 나올 수 있도록 (제재 완화를) 하나의 인센티브로 협의해 보자는 것”이라며 미국의 결단을 바라는 듯한 입장을 내비쳤다.
미국은 즉각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 국무부 관계자는 같은 날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대북제재 완화와 관련, “강력하고 통일된 메시지를 보내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제재 해제 의제를 놓고 한미의 공감대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2018년 한반도 정세와 비교하면 정부가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남북ㆍ북미협상이 활발했던 당시에는 ‘동시 교환’을 기본 틀로 비핵화 논의가 진행됐다. 북한이 내놓을 비핵화 방식 및 범위를 파악하고, 적절한 보상 조치를 맞바꾸는 식이다. 결렬되기는 했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라는 세부 비핵화 조치를 근거로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앞서 2018년 6월 도출된 북미 싱가포르 선언에도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의 의미를 담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내용이 함께 담겼다. 이 과정에서 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한국의 역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반면 지금은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시험 발사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 반대 급부가 마땅치 않다. 전직 고위 외교 관료는 “북한이 비핵화 의지라도 비쳐야 미국을 설득해볼 여지가 생길 텐데, 보상만 들먹이니 정부도 난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대북제재 해제는 당연히 비핵화 과정에서 필요하다”면서도 “다만 비핵화를 위해 북한이 제시할 카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3일에도 조철수 외무성 국제기구국장 명의의 담화를 내고, 극초음 미사일 화성 8호 발사를 이유로 회의를 소집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향해 “명백한 이중기준”이라며 거칠게 비난했다.
정부의 진전된 입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직접 약속한 “10월 초 남북통신선 복원” 여부에 따라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통신선 재가동 이후 남북대화가 무르익고 북한의 구체적 요구가 파악되면 정부의 중재 역할도 되살아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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