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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구원한 것은 전쟁이었다

입력
2021.10.0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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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재로 행진

1936년 생존권을 요구하며 런던을 향해 행진하는 재로 원정대. history.org.uk

1936년 생존권을 요구하며 런던을 향해 행진하는 재로 원정대. history.org.uk

1936년 10월 5일, 잉글랜드 북동부 재로(Jarrow)마을 실직자 200명이 런던 국회의사당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선두에는 마을 자치의회 의장과 시 하원의원이 섰고, 의사 두 명과 이발사, 검은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동행했다. 26일간 의사당까지 약 454㎞를 걷는 그 장정을 그들은 '십자군 원정(Crusade)'이라 명명했다. 의회 회기 개시일에 웨스트민스터궁에 도착해 주민 1만2,000여 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대공황의 먹구름이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던 때였고, 탄원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재로는 사상 유례없는 불황을 겪어왔다. 조선소는 폐쇄됐고, 제철소도 언제 다시 문을 열지 기약이 없다. 공장에서 일하던 8,000여 명의 숙련공 중 임시직으로나마 일하는 이는 고작 100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대규모 해고·실직 사태에 항의하며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와 행진은 1930년대 초부터 '전영해고노동자운동(NUWM)'을 주축으로 영국 전역에서 이어졌다. 정부도 1934년 실업자 지원위원회를 설립하고 26주 실업수당을 신설했지만, 세계적 공황 대책으로는 역부족이었다. NUWM이 공산당과 연계돼 있다는 의혹이 일면서 노동당조차 시위대와 직접 얽히길 꺼렸다. 재로 주민들이 스스로를 '십자군'이라 부르며, 매일 일정 시간부터 50분간 행진 후 10분 휴식하고, 하모니카와 작은북 연주에 포크송까지 부르며 마을들을 지나간 까닭도, 자신들을 NUWM과 차별화하며 체제에 동조하는 성숙한 준법 시민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경로의 마을 주민들은 행진대를 박수와 환호로 맞이하곤 했다.

그들은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생존의 약속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시 하원의원 엘렌 윌킨슨은 노동당 대회장에 뛰어들어 "국민이 굶어 죽고 있다고 제발 정부에 말해 달라"며 울먹이기도 했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의회나 정부가 아니라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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