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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추왓추] 형제 같던 알리와 맬컴 엑스는 왜 서로를 등졌나

입력
2021.09.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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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블러드 브러더스: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편집자주

※ 차고 넘치는 OTT 콘텐츠 무엇을 봐야 할까요. 무얼 볼까 고르다가 시간만 허비한다는 '넷플릭스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긴 시대입니다.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전문기자가 당신이 주말에 함께 보낼 수 있는 OTT 콘텐츠를 넷플릭스와 왓챠로 나눠 1편씩 매주 토요일 오전 소개합니다.

맬컴 엑스(왼쪽)와 무하마드 알리는 한때 사회변혁을 꿈꾸는 동지였다. 하지만 둘은 노선을 두고 결별했다. 넷플릭스 제공

맬컴 엑스(왼쪽)와 무하마드 알리는 한때 사회변혁을 꿈꾸는 동지였다. 하지만 둘은 노선을 두고 결별했다. 넷플릭스 제공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권투 팬들이라면 귀에 익은 명언, 권투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한번쯤 들어본 말이다. 권투의 대명사였던 무하마드 알리(1942~2016)가 남긴 언급이다. 그는 경쾌한 몸놀림과 매서운 주먹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자신의 경기 방식을 저 짧고도 강렬한 수식으로 묘사했다.

알리는 숱한 명언과 화려한 경기 성적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 섰던 면모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돼 있다. 1960년대 백인들에게는 즐거움을 주면서도 위험한 흑인이었던 그는 급진적 흑인 민권운동가 맬컴 엑스(1925~1965)와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블러드 브러더스: 맬컴 엑스&무하마드 알리’는 두 사람의 만남과 친교, 결별을 통해 1960년대 민권 운동의 이면을 들여다 본다.

넷플릭스에서 '블러드 브러더스: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바로 보기

①흑인이기에 불우했던 두 사람

'블러드 브러더스: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넷플릭스 제공

'블러드 브러더스: 맬컴 엑스 & 무하마드 알리'. 넷플릭스 제공

맬컴 엑스의 초년은 민권운동가의 면모와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 마커스 가비는 개신교 목사였다. 흑인 민권운동을 이끌다 백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10대 시절 거리를 떠돌다 20대 초반엔 마약 판매와 매춘 알선으로 밥벌이를 했다. 강도 범죄로 교도소 신세를 졌는데, 그곳에서 전환점을 만들었다. 독서로 지성을 쌓았다. 출옥 후 흑인 민권운동을 이끌던 이슬람 조직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했다. 뛰어난 두뇌와 빼어난 연설실력을 바탕으로 조직 2인자로 성장했고, 흑인사회 거물로 거듭났다.

맬컴 엑스의 소년기와 청년기가 불우했던 반면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의 개명 전 이름)는 화려한 10대와 20대를 보냈다. 권투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18세에 로마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넓고 평평한 길이 인생 앞에 놓여있는 듯했으나 클레이는 고향에 돌아온 후 비감에 젖었다. 미국을 대표해 올림픽에 출전하고 금메달까지 조국에 바쳤다고 하나, 흑인으로 천대 받는 현실은 그대로였다. 누구나 노력하면 꿈을 이루고 온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백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클레이는 배신감에 금메달을 하천에 던져버렸다.

②필연적인 만남, 필연적인 헤어짐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운데)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처음 알렸다. 넷플릭스 제공

캐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운데)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처음 알렸다. 넷플릭스 제공

기독교에 반감을 가졌던 클레이는 이슬람에 관심을 두었다.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했고, 조직의 지도자 일라이자 무하마드로부터 이슬람식 이름 무하마드 알리를 얻었다. 그는 백인들의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며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했다가 실형에 처해졌으나 굴하지 않았다. 당시 무적으로 여겨지던 헤비급 세계 챔피언 소니 리스턴을 누르고 왕좌에 올랐다. 억압적 체계에 굴하지 않고, 백인 지배 체제에 독설을 날리는 알리에게 흑인들은 열광했다.

당대 흑인사회의 영웅이었던 맬컴 엑스와 알리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렸고 자연스레 친구가 됐다. 맬컴 엑스는 알리의 경기를 찾아 대기실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해주었고, 가족과 함께 알리의 집을 찾기도 했다. 두 사람은 피를 나눈 실제 형제처럼 살가운 사이가 됐다. 맬컴 엑스는 알리의 지명도를 활용해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포석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파국이 찾아왔다. 맬컴 엑스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암살되자 “닭이 닭장으로 돌아온 거나 마찬가지”라며 “당연한 일이기에 슬프지 않다”고 말했다가 논란에 휩싸였다. 일라이자 무하마드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대해 조직 내부 누구도 언급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으나, 맬컴 엑스가 죽음을 비하하자 대노했다. 근신처분을 받은 맬컴 엑스는 조직을 탈퇴한 후 독자노선을 걸으며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비난했다. 알리는 ‘배신자’ 맬컴 엑스를 용납할 수 없었다. 둘을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던 미연방수사국(FBI)이 이간질에 나서기도 했다. 알리는 맬컴 엑스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그를 외면했다.

③그들이 남긴 유산

맬컴 엑스(왼쪽에서 세 번째)는 가족과 더불어 마이애미에 있던 무하마드 알리(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집을 찾기도 했다. 넷플릭스 제공

맬컴 엑스(왼쪽에서 세 번째)는 가족과 더불어 마이애미에 있던 무하마드 알리(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집을 찾기도 했다. 넷플릭스 제공

조직을 떠난 맬컴 엑스는 위험에 처했다.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지도자로 신봉하는 이들에게 그는 제거되어야 할 적이었다. 알리의 비난은 그를 향한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집이 화염병으로 공격 당하는 일을 겪으면서도 맬컴 엑스는 자신의 길을 걸으며 세를 규합했다. 하지만 분노의 총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알리는 맬컴 엑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맬컴 엑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알리는 그를 비난했다. 속내는 달랐던 듯하다. 맬컴 엑스의 딸을 만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016년 알리의 장례식에서 맬컴 엑스의 딸은 알리와의 인연을 추억하며 슬퍼했다. 죽은 뒤에야 맬컴 엑스와 알리는 화해한 듯했다. 두 사람은 흑인 민권운동을 위해 의기투합했으나 노선을 두고 갈등하다 반목했다. 하지만 둘은 따로 같이 싸우며 역사를 전진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그들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다.

※권장지수: ★★★★(★ 5개 만점, ☆은 반개)

불과 50~60년 전만해도 미국에선 흑백 분리가 일상적이었다. 흑인들은 백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도, 영화를 볼 수도, 버스를 탈 수도, 예배를 볼 수도 없었다. 미국인이지만 같은 미국인으로 대우 받지 못했던 상황. 급진 이슬람 단체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흑인들만을 위한 분리 독립 국가 건설을 내걸며 흑인사회의 열성적 지지를 얻었다. 다큐멘터리는 196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흑인 민권운동의 중심부를 헤집으며 당대 주요 인물들의 교유와 결별을 되짚는다. 권투선수가 아닌 사회운동가 알리의 면모, 알리와 맬컴 엑스의 남달랐던 관계 등을 자료화면과 사진 등을 통해 복원한다. 알리의 동생, 딸, 맬컴 엑스의 딸 등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더해 두 사람의 인연을 입체적으로 살필 수도 있다. 이 다큐멘터리 한편만으로도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사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평론가 93%, 시청자 100%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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