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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유업 남자들은 행복했을까

입력
2021.09.1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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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직장맘의 일상은 자책, 분투, 비장함 등으로 가득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직장맘의 일상은 자책, 분투, 비장함 등으로 가득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죄송한데, 집에 갓난애가 있어서요.” A의 입에선 끝내 이런 말이 나왔다. 결코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던 말. 눈앞에서 극한보직이 거론될 때마다 하는 수 없었다. 그래. 매일 반복될 야근과 회식, 밤낮을 가리지 않는 상시 연락이 기본인 자리가 이 회사엔 이렇게 많았지. 내가 해냈던 게 원래 저랬지. 그래도 일 좀 해보자는 선배들 앞에서 “제가 이젠 애 엄마잖아요”를 말할 일이 이다지도 많았던가. 일찌감치 언니들이 경고했던 그대로구나. “복직하면 자괴감 들 거야. 그냥 뛰던 트랙을 모래 주머니 달고 뛴다고 생각해. 체력 챙겨.”

어떤 선배는 조금 더 강적이었다. 팀 리더들이 매일 야근을 당연시하는 보직. “제가 집에 어린애가 있어서”라고 난색을 표하자 안타깝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여자 후배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나름엔 격려와 걱정을 가득 담은 말이었다. 퓨즈가 나간 채 그 일을 받아들였으니 어떤 의미론 효과도 있었다. 그 말을 홀로 미워했다 이해했다 원망했다 용서했다 머리를 흔들곤 하는 건 A의 몫이었지만.

이후 펼쳐진 시간은 ‘죄송’의 연속이었다. 혹여 ‘애 엄마라 폐 끼친다’는 말이 나오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발버둥의 결과는 아이 할머니를 갈아 넣는 외주육아였다. 한참 뒤 할머니까지 골병이 들고, 끝내 늦은 밤 아이를 돌볼 유일한 사람이 엄마밖에 남지 않고서야, 선후배들의 배려 속에 요란한 연속 휴가를 써 집안 사정을 수습했다. 달고 살았던 말이 또 주르르 나왔다. “죄송합니다. 송구합니다. 면구합니다. 미안해요. 민폐 끼치네요.”

보람도 있었겠지만, 강적 선배의 기대처럼 A는 엄청 보고 배울 사람이 돼 있진 못했다. 최근에도 한 후배는 이런 말을 듣고 왔다며 A 앞에서 분을 삭였다. “네 (여)선배들이 일을 시켜줘도 안 한다는 걸 어떻게 하냐.” 그곳뿐일까. 그의 주위엔 노동 강도가 높고 조직문화가 보수적인 일터에 속한 이런 직장맘이 수두룩하다.

결국 이런 극한 근무표를 누군가는 받아든다. 또래 아이를 둔 ‘애 아빠’ 동료나 미혼ㆍ비혼 선후배일 확률이 높다. 그들이 때론 기꺼이, 때론 반쯤 우는 얼굴로 이 일을 해내는 걸 볼 때면 마음이 더 복잡미묘하단다. 이런 회사에선 업무를 오전 6, 7시쯤 시작해 새벽 2시쯤 거나한 회식과 함께 끝내는 걸 관리자들이 당연시한다. 이 고난은 해당 노동자가 애 엄마라는 ‘이등’ 딱지를 붙이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강제 중단된다. 보호자 없이는 먹고, 자는 것, 어쩌면 숨쉬는 것도 불가능한 어린 생명이 집에서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 말고는 통하는 핑계가 없다는 거다.

그 자체도 가혹하지만 남는 의문은 이거다. 대체 다른 노동자들의 야근, 잦은 회식, 혹사는 과연 누가, 언제, 어떻게, 어디서부터 끝을 낸다는 것일까. 그 어린 생명을 돌보고 싶은 아빠 노동자한테는 더 매서운 눈으로 “눈치 챙겨”를 언급하는 불합리는 대체 언제 뿌리 뽑는다는 걸까.

A의 한탄과 남양유업 육아휴직 불이익 논란을 바라보며, 다시 궁금했다. 당사자의 분노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사태를 본 동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빠 육아휴직은 더 바보 되겠는데.” “이직을 하든가, 애를 낳질 말든가.” “워라밸 소릴 꺼냈다간 끝장나겠군.” 누군들 행복했을까.

분투하는 직장맘을 회사가 콕 집어 미워할 까닭은 많지 않다. 그를 쫓아내고 다른 사람을 더 마음 편히 혹사시키겠다는 계산 말고는. 그래서 직장맘 불모지는 누구에게나 불행한 일터다. 이렇게 불행에 압도된 기업이 과연 소비자에게 충만한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을까. 그런 묘수를 나는 알지 못한다.

김혜영 커넥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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