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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건너온 영상…북한 아들은 남한 친부 재산 상속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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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건너온 영상…북한 아들은 남한 친부 재산 상속을 주장했다

입력
2021.09.17 04: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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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북한주민 남한 상속재산 찾기>
생사 확인조차 어려운데...친생자 입증도 난관
친생자로 상속받으려면 재산관리인 선임해야
북한주민의 부동산 등 재산권 관리 쉽지 않아
상속 과정에 브로커들 끼어 시장만 혼탁해져
"법무부 감독 강화 실무 절차 개선 필요" 지적

북한주민 B씨의 남한 내 상속재산 찾기 과정. 강준구 기자

북한주민 B씨의 남한 내 상속재산 찾기 과정. 강준구 기자

북한에 거주하는 주민이 대한민국에 있는 가족으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을까. 상속을 받으려면 한국 법원에 소송을 내야 하는데, 이것이 법적으로 가능할까. 다소 절차가 복잡하지만 가능하다. 분단 현실도 단절할 수 없는 혈연관계를 인정해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 주민의 상속권을 법으로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주민 간의 상속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2년 ‘남북 주민 사이의 가족관계와 상속 등에 관한 특례법(남북가족특례법)’이 만들어졌다. 9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많은 북한 주민들이 상속 문제로 대한민국 법원을 찾았다.

하지만 법으로 보장된 권리라고 하더라도 실제 이행 과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남북 간 소통의 장벽, 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타나는 브로커들, 법 취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시스템 등이 권리 행사를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다. 어느덧 현실 속 일부가 돼버린 북한 주민의 드라마틱한 상속권 행사 과정을 한국일보가 들여다봤다.

국경 두 번 넘어 한국 법원 도착한 동영상

"저는 남조선 아버지 A씨의 아들 'OOO'입니다. 상속 문제로 저는 지금 머리카락을 뽑고 있습니다."

'평안남도'로 시작하는 주소가 발신지로 적힌 동영상에서 B씨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었다. 중국 동포인 B씨 대리인이 직접 북한으로 들어가 찍은 뒤 남한까지 들고 내려온 동영상이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다시 남한으로 국경을 넘고 넘은 동영상이 닿은 곳은 대한민국 법원. B씨의 상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험난한 길을 뚫고 도착한 것이다.

아버지 A씨는 6.25 전쟁 중 북한에 B씨를 둔 채 월남했다. 이후 남한에서 건실한 사업가로 성장하면서 상당한 부를 쌓았고, 가정을 꾸려 자녀도 여러 명 있다. 하지만 마음 한곳에는 북한에 두고 온 핏줄인 B씨가 자리잡고 있었다. A씨는 여러 경로를 통해 수소문한 끝에 B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B씨 또한 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됐다.

하지만 A씨는 2012년 사망했다. 부동산만 수백억 원에 달할 만큼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었지만, 미처 재산 상속에 대한 유언을 남기지는 못했다. A씨 사망 이후 B씨가 동영상과 함께 등장한 것이다. B씨는 대한민국 법원에 '친생자관계존재확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아들로서 당연히 상속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동영상을 근거로 B씨 머리카락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고, B씨가 A씨의 친생자임을 인정했다.

브로커에게 '큰돈' 줘야 연락 가능

남북가족특례법에 따라 B씨와 같은 북한 주민들은 한국 법원을 통해 친생자 또는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친생자나 가족으로 확인될 경우, 남한 부모 및 가족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북한 주민이 직접 남한으로 넘어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법원에서 선임하는 '재산관리인(변호사)'을 통한다면 상속이나 유증 등으로 받은 재산을 분할하거나 처분할 수 있다.

문제는 △남한 내 재산관리인을 선임하기 전까지의 과정이 힘들고 △재산관리인을 선임해도 북한 주민이 직접 재산을 손에 쥐는 게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 자녀나 가족 사이에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 틈을 노리고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게 법조계에서 보고 있는 남북한 가족 상속의 현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남북한 가족 간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연락을 취할 '공식 채널'이 없다는 점이다. 당연히 비공식적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고, 중국과 북한 접경 지역의 '브로커'들이 연락책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을 통하면 북한 자녀나 가족과 연락하는 건 물론이고 중국 등 제3지대에서 만나는 것도 가능하다.

당연히 비용은 비싸다. 브로커들이 부르는 게 값이다. 북한에 사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또는 이들을 북한에서 나오게 하는 데 보통 1,000만 원 이상 지불해야 한다. B씨처럼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 남북한 가족의 연락이 닿을 때도 종종 있지만, 이는 아버지 A씨의 재력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흔치 않은 사례다.

DNA 확보하려 묘 파헤치기도

브로커들이 단순 연락책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남한 가족의 생사와 재산 상황을 파악한 뒤,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접근해 친생자·가족 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꼬드긴다. B씨의 경우엔 중국 동포이면서 중국 내 대학 부총장 출신인 '고급 브로커'가 이런 역할을 했다. 동영상을 보내겠다는 아이디어도 이 고급 브로커가 고안한 것이었다.

이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6.25전쟁 당시 월남했다가 최근 사망한 이모씨와 북한 형제들 사이에 등장했던 브로커들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이씨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북한에 사는 자녀들이 친생자 확인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땅에 묻힌 이씨의 시신에서 DNA를 채취해 대조하는 게 유일했다. 모두가 '비상식적'이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한국인과 중국 동포가 섞여 있던 브로커 일당은 이씨의 묘를 파헤쳤다. 다행히 묘지 관리인에게 발각돼 시신을 훼손하는 불상사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이들은 '분묘발굴'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신세가 됐다.

이 사건에 대해 잘 안다는 변호사는 "다행히 사망한 이씨가 자신의 DNA를 대학병원에 보관해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이들의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처럼 유전자 은행 등 공식적인 방법으로 DNA를 관리하지 않으면 남한 내 북한 주민의 재산을 노리는 브로커들이 어떤 짓을 해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친생자 확인해도 여전히 '산 넘어 산'

어렵게 친생자나 가족 관계를 입증해도 곧바로 상속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남한에 또 다른 자녀들이 있다면 이들과 재산을 적절히 분할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녀들 중 한쪽은 북한에 있으니, 대화로 해결하기보다는 법정에서 송사를 벌이는 게 대부분이다.

북한 주민이 어렵사리 재산을 얻는다 해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등기소에서 북한 주민의 상속 등기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각종 '서류 싸움'을 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부동산거래신고필증에 매도인으로 북한 주민을 넣는 게 가능한지 따져보는 것까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 모든 과정을 재산관리인이 하나 하나 '맨땅에 헤딩'식으로 알아봐야 한다.

실제 B씨의 재산관리인은 "필증에 매도인으로 넣기 위해선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하는데, 북한 주민은 이런 게 없지 않나"며 "알고 보니 법무부에서 여자는 생년월일에 '0000001'을 붙이고, 남자는 생년월일에 '900001'을 붙이는 식으로 부여하는 '북한주민 등록번호'가 있었다. 이런 기본적인 절차도 알려진 게 없고, 관련 기관들도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명제 탓에 북한 주민 이름으로 계좌를 개설할 수도 없어, 부동산을 매각하더라도 이 돈을 보관할 곳도 마땅치가 않다.

상속 정리되면 또 등장하는 '브로커들'

북한 주민의 상속이 확정됐다는 소식이 퍼지면 또 다시 '브로커'들이 달라붙기 시작한다. 남북가족특례법상 북한 주민의 재산은 생활비와 치료비 등 명목으로 인정되는 경우에 법무부 장관 허가를 얻어야 비로소 사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주민이 직접 신청할 수 있는 방도가 딱히 없어, 대리인을 통해 허가 절차가 진행되는 게 대다수다.

북한 주민 재산관리인으로 활동하는 이홍주 사람과법 대표 변호사는 "북한 주민 재산이 거액이거나 다수의 부동산일 경우엔 재산관리인 한 명이 책임지는 건 상당히 부담된다"며 "가짜 대리인을 선별할 때도 재산관리인 판단에만 의존하는 구조다. 이런 점에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상무 기자
손현성 기자
최나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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