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자딘·제리 브로턴 '글로벌 르네상스' 번역 출간
당대 예술품 분석 통해 동서 문명 교류 실제 밝혀
부흥기, 전성기의 동의어로 '르네상스'라는 수식어가 수시로 출몰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K팝, K드라마, K콘텐츠의 르네상스다. 르네상스를 중세와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이자 근대의 출발점으로 규정한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영향이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힌 부르크하르트의 고찰이 국내에도 소개되면서, 르네상스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최근 번역돼 나온 '글로벌 르네상스: 동양과 서양 사이의 르네상스 미술'의 저자 리사 자딘, 제리 브로턴에게 르네상스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이들은 부르크하르트의 유럽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품이 본질적으로 동양과의 강력한 연관 관계를 함축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각각 국내에서도 출간된 '상품의 역사'(리사 자딘), '르네상스'(제리 브로턴)를 통해 르네상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던 학자들이다. 자딘은 전작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은 소비의 대상이자 상품이었다"고 주장한다. 브로턴의 '르네상스'는 르네상스를 광범위한 국제적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무역, 금융, 상품, 후원 등이 르네상스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하는 책이다.
따라서 두 저자가 토론을 거쳐 함께 써 나간 '글로벌 르네상스'는 유럽 문명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데 급급했던 기존 르네상스의 개념에 반기를 든 책이라 할 만하다. 이들은 르네상스라고 알려진 시기에 지속적 영향력을 지닌 상징과 이미지를 유럽에 제공한 곳은 동양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르네상스기에 서양과 동양의 경계는 명확히 나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갈등적 상황 속에서도 두 세계는 어떤 형상과 이미지를 상호 간에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역이용할 줄도 알았다. 예컨대 베네치아공화국 출신 화가 젠틸레 벨리니가 그린 오스만제국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는 군사 지도자가 아닌 르네상스 후원자로서 메흐메트 2세의 모습을 보여준다. 벨리니는 베네치아 의회의 대여 형식으로 파견돼 술탄이 고용한 궁정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
저자들은 서양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의 공동 생산자로서 동양을 이해할 수 있도록, 휴대가 용이해 교환가치가 컸던 초상메달과 태피스트리(직물 공예)를 예로 든다.
선물이나 수집의 용도로 유럽 전역,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로 전파된 초상메달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권력 경쟁과 관련된 메시지가, 때로는 동양 권력가의 이미지가 담겼다.
태피스트리는 전통적 예술사에서는 무시되고 간과돼 왔지만 점차 유럽에서 필수적인 장식 역할을 하면서 경제력을 갖춘 이들의 사치품이 됐다. 작업이 고도화하면서 동양에서 수입된 염료가 사용되고 오스만의 모티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디자인도 발견됐다.
'생명력 있는 사치품'이었던 말(馬) 문화도 서양 르네상스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 자체로 미적 대상이자 교환 가능한 고가의 품목이었고, 군주들 사이에 주고받은 선물이자 신분적 상징이었던 말 역시 동서 문명 교류의 실제를 잘 드러낸다는 설명이다.
저자들은 르네상스 예술품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단순히 미학적 차원뿐만 아니라 당대의 특화된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해석과 함께 이뤄져야 함에 주목한다. 르네상스 문화란 유럽적 현상이라기보다 '르네상스적 지구촌화'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르네상스를 유럽으로 한정하지 않고, 국제적 관점으로 확대해 그야말로 '글로벌 르네상스'로 파악한 데 의의가 있는 책이다. 르네상스기에 양방향으로 동서양 사이에 전개된 물질 교환, 그것이 유럽의 문화 정체성에 끼친 지속적 영향을 상세히 보여준다. 근대를 향한 변화는 서양이 독자적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동양과의 교류와 경쟁을 통해 이뤄졌다는 주장이다.
원저작물은 2000년에 출간됐다. 따라서 출간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을 '르네상스 유럽의 경계 허물기'는 이제는 서양 학계에서도 크게 새롭지 않은 시각이 됐다. 다만 역자의 지적처럼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사회적 약자·다른 민족에 대한 편협성을 드러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책이다. 80장에 이르는 도판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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