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 '만선' 1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지난 3일 개막한 연극 '만선'(국립극단)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폭풍 속으로'(1991)의 엔딩을 닮았다. 영화에서 은행 강도인 보디(패트릭 스웨이지 분)는 서퍼다. 끝내 경찰에 붙잡힌 순간에도 가장 큰 파도를 타겠다는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폭풍이 치는 바다로 들어간다. 순수하고 지독한 열정이다.
'만선'의 주인공 곰치(김명수)도 비슷하다. 어부인 그는 바다에서 아들 넷을 잃었고, 딸은 팔려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빚 때문에 전 재산이 선주에게 넘어가는 상황에서조차 만선을 꿈꾼다. 자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고야 말겠다는 아집이며, 광기에 가깝지만 또 한편으로는 거룩하다.
'만선'의 끝 장면에는 남해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곰치네의 풍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센 파도가 치고 장대비가 내리는 날 모든 것을 잃은 곰치는 다시 한 번 부서(보구치)떼를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오겠노라 다짐한다. 그의 발치에는 운명과도 같은 족쇄(그물)가 놓여 있고, 옆에는 모든 자식을 잃은 채 실성한 아내 구포댁(정경순)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 이들은 온몸이 홀딱 젖도록 비를 맞는다.
이 비는 은유적 연출이 아니다. 공연장이 잠길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양의 물줄기가 무대 천장에서 실제로 뿜어져 나온다. 무대 뒤편 포구에서는 방파제에 부딪힌 듯한 파도의 흔적이 쏟아진다. 객석 앞줄이 젖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연극에서 구현이 될까 싶을 정도로 생생하고, 스펙터클하다. '만선'은 바로 이 피날레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인상적이다. 이 때문에 공연에서는 커튼콜을 위한 마지막 암전이 이뤄지기도 전에 박수 세례가 터져 나왔다.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공연장 내에서 함성을 지르는 일은 금지돼 있지만,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브라보"를 연호하는 관객이 적지 않았다.
곰치네의 가세를 상징하는 듯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는 무대 바닥과 집 등 세트는 '사실적 묘사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상황에 좀 더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연출 의도에 충실하다. 배우들 손에 들린 거대한 돛과 그물은 지금 막 어느 어촌에서 가져온 듯 현실적이다. 의상 또한 사실주의 희곡답게 향토색이 짙다. 하지만 마냥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빈티지 감성을 넣었다.
주역을 맡은 김명수, 정경순 배우의 열연은 자연스럽게 객석의 기립을 이끌 정도로 강렬하다. 특히 사극 드라마로 친숙한 김명수의 거칠고 예스러운 연기는 집념과 좌절의 캐릭터 곰치를 표현하는 데 특화돼 있었다. 악독한 선주 임제순 역을 맡은 원로배우 정상철부터 국립극단의 젊은 시즌 단원들까지 배우 모두가 유창한 호남 사투리를 구사하며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친다.
2008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돼 'MZ세대'에게도 친숙한 천승세 작가의 희곡 '만선'은 1964년 국립극장 희곡 현상 공모 당선작으로 초연됐다. 올해는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으로 다시 무대에 올랐다. 특히 이번 공연은 곰치네의 비극이 개인사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구조 차원에서도 부각된다. 선주와 어부, 가진 자와 가난한 자라는 대립적 시각으로 짚어낸 부조리가 시시각각 극을 채운다. 공연은 19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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