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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자

입력
2021.09.10 22: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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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앞다릿살 요리. 한국일보 자료사진

돼지 앞다릿살 요리.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때까지 나는 알지 못했다. 돼지고기 앞다릿살이 뒷다릿살보다 두 배나 비싸다는 걸. 가끔 큰맘 먹고 어른들에게 고기를 선물했지만 곰탕용 소꼬리, 한 종류였다. 육식하지 않는 내가 굳이 돼지고기의 부위별 가격까지 꿰고 살 일은 없었던 거다.

“아, 이런 천하의 등신 바보 멍청이 같은 인간을 봤나. 정신 똑바로 차려.”

매주 두 차례 병원 가서 도수치료 받는 돈이 아깝다고 털어놨을 뿐인데, 전화기 저쪽에서 그가 별안간 욕을 해댔다. 한 번 갈 때마다 10만 원씩 깨지는 치료비가 아까워 좀 징징댔기로서니, 이렇게나 푸짐하게 욕 얻어먹을 일인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참을 더 씩씩대던 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당신 사는 꼬락서니가 꼭 내 모습 같아서 그래.”

그는 부자다. 내가 아는 이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력가다. 나보다 고작 세 살 많은 나이, 차근차근 쌓아 올린 본업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뤘다. 가끔 손대는 주식과 부동산에서도 황금빛 광채를 내는 그의 재능이 나는 무지하게 부럽다. 정작 나를 질투 나게 하는 건 따로 있다. 제 한 몸에 장착한 성실과 능력만으로 여기까지 왔건만 그가 돈 갖고 치졸하게 장난치는 걸 본 적이 없다.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통도 커서 과일이며 생선 같은 제철 먹거리를 지인들에게 자주 보낸다. 어쩌다 그의 ‘아는 사람’ 리스트에 오른 나 역시, 탐이 나지만 내 돈 내고 사기 망설여지는 온갖 물품을 그에게서 받아왔다. 그 시간이 20여 년이다. 보통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타인의 그늘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능력도 타고났다. 그 특별한 시선 덕에 막다른 길에 몰렸다가 가까스로 회생한 이들이, 내가 아는 사례만 해도 여럿이다.

그런 그가 내게 뜻밖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궁핍하던 20대와 30대 초반, 고기가 너무 먹고 싶을 때면 시장에 가서 돼지 뒷다릿살을 사다 양파와 김치를 왕창 넣어 찌개를 만들어두고 몇 날 며칠이고 먹었다고 했다. 그게 커다란 사치였다고. “한데 말야, 습관이란 게 얼마나 질긴지 마트에 가면 한우 꽃등심 앞에서 마른침을 삼키다가도 이리저리 가격 따져보고는 결국 돼지 뒷다릿살을 카트에 넣는 거야. 어느 순간 그런 내 모습이 너무 궁상맞고 쓸쓸하더라고. 이만큼 열심히 살고도 정작 나 자신에게는 끝까지 인색하구나.” 그러니까 그는 꾹꾹 눌렀던 내면의 설움을 자기 성취의 발끝에도 닿지 못하는 나에게 투사하며 그렇게 욕을 해댔던 거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2년 전부터 어금니 질끈 깨물고 습관을 바꿔나가는 중이라고 그는 말했다. 성과가 있냐는 질문에 의기양양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 앞다릿살로 갈아탄 게 언젠데. 비싼 값을 하더라고. 부드럽고 맛있어. 우하하!” 짠한 마음에 눈물까지 질질 흘리며 한참을 웃어댔다.

전화를 끊고 돼지고기 앞뒤 다리를 검색했다. 두 배 가격 차가 났다. 자 이제, 그가 군침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도달하지 못했다는 한우 꽃등심을 알아볼 차례다. 소와 돼지가 죽어서까지 이토록 심하게 차별대우 받는 줄 나는 여태 몰랐다. 돼지 앞다릿살보다 무려 열다섯 배 비쌌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꽃등심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열심히 운동해서 도수치료 2주만 단축하면 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나둘 하나둘, 밴드를 어깨 뒤로 당겨 W자를 만드는 운동이 오늘 따라 참 재밌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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