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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쉽게 서로를 돌보는 '문란한' 돌봄 공동체를 꿈꾸며

입력
2021.09.09 16: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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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에이즈 활동가 더글러스 크림프의 '애도와 투쟁'

편집자주

차별과 갈등을 넘어 존중과 공존을 말하는 시대가 됐지만, 실천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모색한다, 공존’은 다름에 대한 격려의 길잡이가 돼 줄 책을 소개합니다.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한국일보> 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2일 총파업을 결의했던 보건의료노조가 개시 5시간 전 노정합의에 따라 파업을 철회했다. 1년 반이 넘게 지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보건 의료 노동자들의 과로는 가중됐고, 돌봄 노동의 모순을 못 본 체하며 겨우 유지돼 온 구조는 한계를 드러냈다. 구조적 무관심과 돌봄의 부재로 인해 보건의료노조의 총파업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요양소와 시설이 폐쇄되자 가정은 돌봄을 떠맡았고 가정 폭력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우리는 너무 많은 돌봄 요구를 너무 오랫동안 시장과 가족에게 맡겨 왔다"고 주장한 책 '돌봄선언'(니케북스 발행)이 주목받았다. '돌봄선언'은 대상을 차별하지 않고 무한히 증식해 나가는 '문란한' 친밀성을 주장하고 나선다. '문란하다'는 주로 애정 관계, 성적인 관계가 복잡하거나 부정적 상황을 지칭할 때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인 돌봄에 왜 '문란하다'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가족이 아니더라도, 돈으로 사고팔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친밀하게 돌보는 관계가 돼야 한다는 '문란함'은 더글러스 크림프의 글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의 문란한 사랑을 계속하는 법'에서 가져왔다.

미술이론가이자 큐레이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활동가인 크림프는 에이즈는 문란한 동성애자들이 걸리는 병이기 때문에, 병이 아니라 환자가 문제라고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문제 삼으며 '문란함'을 다시 정의하려고 시도한다. 최근 번역된 그의 책 '애도와 투쟁'(현실문화 발행)은 1980년대 미국 사회의 에이즈 공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감염병 시대의 예술과 정치를 논한다는 점에서 2021년 우리의 현실을 관통한다. 그는 에이즈 공포가 '페이션트 제로(최초 감염자)'를 비롯한 동성애자를 '문란한 자들'로 호명하며 타자화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서로에 대한 친밀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고 상호 돌봄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니냐고 되받아친다. 동성애자들이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감염병을 확산시켰다는 비난에 대해, 누구와도 쉽게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고, 가족처럼 돌보는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이는 크림프가 묘사하는 퀴어들의 장례식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퀴어의 장례식에서 죽은 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힐 수 없고, 애인 역시 가족의 자리에 설 수 없다. 그저 익명의 친구로 남을 뿐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자리에서조차, 당사자가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 종종 펼쳐진다. 때로는 가족이 장례식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공동체의 친구들이 장례식을 준비한다. 네가 누구라도, 친족, 성적 지향, 시민권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공존을 모색하는 돌봄 문화는 감염병의 시대에야말로 전 사회로 확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올해 공연된 퀴어를 가시화하는 연극들('연극연습 3:물고기로 살기',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은 유언이나 장례식 등 죽음을 전면화한다. '나의 장례식장에는 퀴어 해방의 깃발을 걸고, 영정 사진으로는 가장 최근 사진을 쓸 것이며, 육개장이 아니라 비건 식사를 대접하고, 절대 여자 옷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유언장은 가족이 아니라 친구에게 맡겨진다. 친구를 유언 집행자로 지정하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퀴어 당사자는 애도하며 서로의 곁을 확인하고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을 바꾸어 나가기 위한 돌봄을 전면화한다는 점에서 크림프가 말하는 '애도하는 투쟁'이 된다. 그리고 그 달라질 현실을, 퀴어도 비(非) 퀴어도,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애도와 투쟁·더글러스 크림프 지음·김수연 옮김·현실문화 발행·456쪽·2만5,000원

애도와 투쟁·더글러스 크림프 지음·김수연 옮김·현실문화 발행·456쪽·2만5,000원


허윤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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