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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앱에 "빨리 죽어라" 저격글... 그냥 당해야 하나요

입력
2021.09.08 04:30
수정
2021.12.25 10:5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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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무슨 휴가를 저렇게 자주 감? 완전 민폐 아닌가."

몇 달 전 회사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익명 소통 앱 블라인드에 이런 글이 게시됐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하루 뒤 "OOO 회사가 해고 안 하고 뭐함?"이란 글이 또 올라왔습니다. 제 이름을 보고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격한 대상이 바로 저였던 겁니다.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됐어요.

저는 개인적인 가정사로 인해 상반기엔 단기 휴직을 한 차례 했고, 하반기엔 연차휴가 등을 많이 쓰게 됐습니다.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대부분 불가피한 사정임을 이해해주었고, 회사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블라인드에 익명으로 인식공격성 글이 올라오기 시작한 거죠.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었습니다. 입에 담기 곤란한 욕설과 가족 관련 신상 정보를 언급하기도 하고, "그냥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빨리 나가 버려" 같은 악성 댓글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를 두둔해주는 댓글도 적지 않았지만요.

회사가 의도적으로 이런 행위를 벌인 것인지, 같이 일하는 동료 중 누군가가 앙심을 품은 것인지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회사 복도를 걷거나 화장실만 가도 모두 저를 쳐다보고 수군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식사도 혼자 나가서 하게 되었고, 같은 팀 동료들과 말도 섞지 않게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아 정신과 치료와 심리상담까지 받고 있습니다.

고민 끝에 경찰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블라인드가 미국 법인이라 한국 영장으로는 정보를 제공받을 수 없다며 고소장 접수가 반려됐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닌가 싶어 회사에도 신고를 했습니다. 회사는 일단 사내 공지를 통해 블라인드 게시물에 대한 고소 조치가 들어갔다는 안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조치는 없다고 했습니다. 가해자가 누군지 알 수가 없으니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가해자를 찾아오면 그때부터 심사를 하고 조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회사의 판단대로 가해자가 밝혀지지 않으면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되지 않는 건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회사에 요구할 수 있는 조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A씨(자동차회사 사무직)

여럿이 특정인을 인신공격... '직장 내 괴롭힘' 될 수도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뒷담화’로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특정인을 비하하는 소문이 도는 경우인데, 일일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쉽지 않아 속수무책 당하기 일쑤죠. A씨가 겪은 사례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만 온라인 공간에 피해자를 특정해 수십 개의 인식공격성 게시물을 올렸다는 점에서 사안이 간단치 않습니다. 그것도 가해자가 한 명이 아닌 것 같네요. 여러 명의 직장 동료들이 합심해 ‘집단린치’를 가한 사건인 것이죠.

그런데도 회사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정부가 발간한 매뉴얼을 보면 '익명성이 보장되는 게시판에 특정 인물에 대한 폭언을 하는 등의 행위는 행위자 특정도 어렵고, 우위성을 이용한 행위라 보기 어려워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A씨 사례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해당 매뉴얼 다음 페이지에는 '지위의 우위'뿐 아니라 '관계의 우위'도 괴롭힘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반드시 상하 관계에 있어야만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바로 '개인 대 집단과 같은 수적 측면'입니다. 가해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면 '우위성'을 이용한 괴롭힘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A씨 사례를 보면 짧은 기간에 개인 신상 정보가 포함된 글이 수십여 건 집중적으로 올라왔고, 글마다 여러 개의 악성 댓글이 달렸습니다. 모두 동일인의 소행이라 할 수 있을까요. 복수의 동료가 가해를 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 판단기준*아래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함

1. 행위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
2. 행위장소 반드시 사업장 안일 필요는 없음(사내 메신저·SNS도 포함)
3. 행위요건 ①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할 것
②업무가 적정범위를 넘을 것
③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일 것

가해자 특정 어려워도 유급휴직 등 요구할 수 있어

물론 그렇더라도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문제는 남습니다. 그러나 게시판에 글을 올린 사람이 '사용자 또는 근로자'라는 점은 명확해 보입니다. 블라인드는 사내 이메일을 통해 승인을 받아야만 직장별 게시판에 접근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누가 올렸는지는 찾기 힘들더라도 회사 사람들이 직장 동료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했다는 피해 사실은 충분히 입증이 가능한 상황이란 거죠.

따라서 A씨 사건은 현재 '가해자가 밝혀질 때까지 조사 중인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회사가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에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일 뿐 사건이 종결된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 경우 A씨는 회사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사용자는 조사 기간 동안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해당 피해근로자 등에 대하여 근무장소의 변경, 유급휴가 명령 등 적절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이 경우 사용자는 피해근로자 등의 의사에 반하는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근로기준법 76조 3(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조치)의 ③

이 조항에 따르면 A씨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근로자'로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이 원한다면 다른 부서로의 이동이나 유급휴가 등을 신청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블라인드 소통 갈수록 활발... '업무와 연결된 공간'으로 봐야

만약 회사가 거부 의사를 보인다면 노동청에 관련 진정을 제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또 다른 쟁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하려면 '업무관련성'이 인정돼야 합니다. 업무수행 중에 발생한 행위이거나 업무수행 중이 아니라도 업무수행을 빙자해서 발생한 행위에 해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내 게시판이라면 논란의 여지가 없겠죠. 하지만 블라인드에 대해선 아직 고용부의 유권해석이나 법원 판례가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블라인드가 외부 업체가 운영하는, 회사의 관리 영역을 벗어난 공간이라 사적인 커뮤니티로 간주돼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물론 블라인드를 업무 연관성이 높은 공간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씨 사례처럼 블라인드에서 개인을 특정해 공격하고 여럿이 '조리돌림'을 했다면 '업무와 연결된 공간'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게 저와 제가 속한 기관(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의 판단입니다. 블라인드가 직장 내 중요한 소통 공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인 만큼 개인을 특정한 다수의 인신공격은 오프라인에서의 ‘직장 내 괴롭힘’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은 '해사행위'... 회사가 예방 시스템 만들어야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도입된 취지가 무엇인지 다시 짚어봤으면 합니다. 이 법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현재까지 가해자에 대한 처벌 조항이 없고(10월 14일 시행되는 개정안에는 사업주 또는 사업주 친족의 근로자가 가해자인 경우 1,000만 원 이하 과태료 처분 조항 추가), 조사나 사후 조치의 책임을 모두 회사가 담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가해자를 색출하고 처벌하는 것 자체가 이 법의 핵심 목적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이 근절돼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회사의 근무환경을 해치고 생산성을 저하하는 ‘해사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보다 경영진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예방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A씨 사례에서 회사의 결정이 아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회사 사람들에 의해 근로자 한 명이 괴롭힘을 당한 사실이 명백한데도, 가해자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 법의 입법 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입니다. 근로자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회사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요.

※회사 생활을 하며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해결책이 궁금하시다면 누구라도 제보를 해주세요. 이메일(119@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직장갑질119 임혜인 노무사

정리= 유환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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