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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가해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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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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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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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Words : 여성의 언어

이번 생에서 당신이 안전을, 즐거움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알기에 싸우는 것이어야 한다.
Fight because you know that in this life, you deserve safety, joy, and freedom.

미투 운동을 확산 시킨 샤넬 밀러의 책 '디어 마이 네임'

Her View : 여성의 관점

게티이미지뱅크


(22) 끝나지 않을 듯한 시간이 지난 후(8월 26일자)

독자님, 안녕하세요.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시곗바늘을 3개월 전으로 돌려볼게요. 지난 5월 검찰은 내부 훈령에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기로 했는데요. 이 소식이 참 반가웠어요. 수치심에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 마치 '성폭력 피해자는 떳떳하지 못해야 한다'는 굴레를 덧씌운다고 생각했거든요.

국회에도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을 바꾸기 위한 법안들이 계류 중인데,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성적 수치심이 "분노와 공포, 무력감을 경험하는 성희롱 피해자의 감정과는 거리가 먼 표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성폭력 범죄의 원인 마저 피해자에게 돌렸던 과거는 점점 우리와 멀어지고 있는 걸까요? 이번 주 허스토리는 수치심은 피해자의 것이 아니라 바로 가해자의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해요.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 사건이라 할지라도…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에 등장하는 이 문장에서 기시감을 느낀 분들, 많으셨죠? 우리가 여러 번 목격한 성폭력 가해자의 극단적 선택처럼, 처벌받을 당사자가 사라진 곳에서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피해를 구제받을 기회조차 잃게 됩니다. 피의자(혹은 피고소인)가 사망할 경우 형사 사건은 '공소권 없음'을 이유로 종결되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일하던 로펌의 대표 변호사를 성폭력 혐의로 고소한 신임변호사 A씨는 이러한 현실을 넘어 서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초임 변호사 미투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지난 5월 대표 변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지난 3일 수사 내용을 상세히 담은 7쪽 분량의 불송치 결정문을 피해자에게 송달했는데, 이는 '공소권 없음'이라고 짧게 기술했던 기존 결정문에 비춰보면 이례적인 일이에요. 사건 당사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하지만 A씨는 검찰에 이의신청을 했어요. 피의자가 사망해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내리는 건 불가피하더라도, 혹시 피의자가 살아있었다면 기소가 됐을지 검찰이 법리적 판단을 해달라는 취지로요.

피해자 변호를 맡은 이은의 변호사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성범죄 사건이 공론화된 뒤 피의자가 숨지면 피해자는 더 큰 지옥에 빠진다"라면서 "수사기관이 피해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는 일이 절실하다"고 말했어요. 사망한 가해자에게 법적 처벌을 할 순 없지만, 피해 사실까지 지워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A씨의 이의신청으로 성범죄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환될 수 있을지 함께 지켜봐요.

▶이은의 변호사 인터뷰 전문 읽기(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82211450001292)


2차 가해와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공론화한 이후 맞닥뜨리는 또 하나의 벽, 2차 가해입니다. 특히 가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 피해자들은 오히려 자신이 가해자를 죽게 만든 것이라는 2차 가해에 시달려요. A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상 노출에 대한 두려움도 A씨의 몫이었어요. 변호사 단체 채팅방에서는 가해자의 로펌에 다녔던 여성 변호사를 추린 '피해자 후보' 사진이 공유됐어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으로 고소했던 B씨는 최근에도 법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박 전 시장 유족을 대리하는 정철승 변호사가 자신의 SNS에 박 전 시장이 피해자를 성추행했다는 물증이 없다는 등의 내용을 게재했기 때문인데요. 피해자 측은 12일과 16일 정씨를 성폭력처벌법 위반,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등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이에 앞서 B씨는 자신의 이름과 근무지가 공개된 온라인 게시글 탓에 개명까지 해야 했어요. 검찰은 이 게시물을 올린 40대 여성 최씨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습니다. 선고는 다음 달 9일이에요. 피해자 신상을 노출하고 피해자의 주장을 거짓이라 매도하는 2차 가해와의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을 듯한 시간을 버티고 버텨

누군가가 한 줄의 기사 제목으로 끝나는 사건이 피해자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일일 거예요. 그 시간들을 버텨내고 가해자를 상대로 승소한 피해자들의 소식이 최근 전해졌어요. 전 테니스 선수인 김은희씨가 초등학생 시절 성폭력 가해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가 확정됐어요. 김씨가 테니스코치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건 초등학생 때인 2001~2002년이었기 때문에, 10년이 지난 범죄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권리가 있는지가 이번 소송의 최대 쟁점이었는데요. 법원은 청구권 시효의 시작을 가해자의 마지막 범행이 아닌 피해자가 성폭행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은 때인 2016년으로 봐야 한다며 김씨 손을 들어줬습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구제 범위를 넓힌 판결로 평가됩니다.

▶판결 기사 자세히 읽기(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81913230001003)

성희롱 피해를 폭로한 피해자들에게 '가짜 미투'를 주장했던 시인 박진성씨는 최근 민사소송에서 잇달아 패소했습니다. 박씨가 자신에게 스토킹 피해를 받았다고 언급한 후배 시인 유진목씨와 '연인관계였다'고 주장한 것은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앞서 박씨는 자신의 성희롱 의혹을 최초로 폭로한 김현진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지난 5월 패소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건들에도 이번 사건이 영향을 미치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를 안도하게 하는 소식들은 말 그대로 한 줄기 빛 같습니다. 여전히 어둠 안에 머무른 이야기들을 너무 많이 듣고 있기 때문일까요. 성추행한 상관의 죄를 묻고 싶을 뿐이었던 공군과 해군의 중사가 세상을 등졌고, 이번 주에는 육군에서도 성추행 피해 부사관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왜 그때 바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느냐" "살면서 한번 겪을 수 있는 일" "가해자가 불쌍하지 않냐" "피해자답지 않다" 같은 말들이 피해자를 향하곤 합니다. 허스토리는 피해자들이 세상에 남아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치심도, 잘못도, 죗값도 가해자의 몫이기를 바랍니다. 올해 초 성추행 피해 사실을 직접 밝힌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글을 전합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가해자의 사실인정과 진정성 있는 사죄, 그리고 책임을 지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해자 스스로가 이를 거부한다면 사회가 적극 나서서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중략)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모든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함께 일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

※ 포털 정책 상 본문과 연결된 하이퍼링크를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한국일보닷컴(https://hankookilbo.com)에서 보시거나 뉴스레터를 구독하시면 편리하게 링크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hankookilbo.com/NewsLetter/herstory)

Her Story : 여성의 이야기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국내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영화제인 동시에 세계 최고, 최대 여성영화제로 손꼽히는 영화제.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더 넓고 깊은 관점을 만나봅니다.

젠더 감수성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어서 보면서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영화를 찾아 헤맨 분들, 벡델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콘텐츠인지 마음 속으로 직접 테스트를 진행해 봤던 분들… 모두 여기를 주목해주세요! 오늘(26일)부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개막하거든요. 1997년 처음 막을 올린 이후 벌써 23번째예요.

서울여성영화제는 성평등한 영화와 여성영화인을 발굴하는 데 오랜 시간 힘을 쏟아 왔어요. 7월 15일에 보내드린 뉴스레터에서 소개한 강유가람 감독의 '우리는 매일매일'도 2019년 21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한국장편경쟁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에요. 올해 개막작은 우리가 귀여워 마지않는 캐릭터 '무민'을 탄생시킨 토베 얀손(1914~2001)의 삶을 그린 '토베 얀손'인데요. 박광수 서울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도 강력추천하는 작품이라고 해요. 또 매해 가장 뜨거운 여성의제를 선정하는 '쟁점들' 섹션에서는 "래디컬을 다시 질문한다"라는 주제로 관련 영화들을 상영합니다.

여성 영화를 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영화제에 직접 찾아가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여성영화 전문 OTT인 퍼플레이를 소개해 드릴게요.

▶박광수 서울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인터뷰 읽어보기(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82409210000075)

▶조일지 퍼플레이 대표 인터뷰 읽어보기(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40109290000021)

성평등한 영화와 여성 영화인에 대한 지원은 영화 산업 내 성평등 문화 확산이라는 효과에 그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다양성 콘텐츠를 많이 접할수록 관객들의 가치관과 그들이 만드는 사회의 모습 또한 평등에 보다 가까워질 테니까요. 언젠가 허스토리 독자분들과 영화 단관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이번 주 뉴스레터를 마감합니다.


※ 본 뉴스레터는 2021년 8월 26일 출고된 지난 메일입니다. 기사 출고 시점과 일부 변동 사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허스토리'를 즉시 받아보기를 원하시면 한국일보에서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양진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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