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용 변호사 살인교사 자백 50대 구속
수사본부까지 꾸렸던 장기미제 풀릴지 주목
경찰 “진술 외 범행 입증할 증거 확보” 자신감
1999년 11월 5일 오전 6시 48분. 제주 제주시 제주북초등학교 북쪽 옛 체신아파트 입구 삼거리 도로에 주차된 승용차 주변에 붉은 핏자국들이 선명했다. 지나가던 주민이 조심스럽게 차 안을 들여다봤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운전석에 한 남성이 고개를 숙인 채 숨진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이승용 변호사 살인사건’ 용의자 김모(55)씨의 신병을 경찰이 사건 발생 21년 9개월 만에 확보하면서 제주의 대표적 장기미제 사건이 해결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경찰은 자신이 살인교사범이라는 김씨의 자백을 토대로, 김씨가 살인 당사자일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재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다만 사건이 오래된 데다가 김씨가 범행 당사자라고 지목한 이들이 이미 사망한 터라 진실 규명이 쉽지 않을 거란 관측도 없지 않다.
차 안에서 숨진 검찰 출신 변호사
살해당한 이승용 변호사(당시 44세)는 제주 출신으로, 서울대 졸업 후 서울지검, 부산지검 등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가 1992년 고향으로 내려와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시신에선 수차례 흉기에 찔린 흔적이 발견됐고, 부검 결과 심장 관통에 의한 과다 출혈이 사인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이 변호사가 차량 밖에서 흉기에 찔린 후 차량 안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차량 안팎에 핏자국이 이어진 점, 이 변호사가 차량 열쇠를 쥔 채 숨진 점이 근거였다. 당시 이 변호사는 코트를 입고 있었고 현금이 든 지갑도 그대로 소지하고 있었다.
경찰은 계획적 살인 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개시했다. 7개 팀 40여 명 규모의 수사본부를 설치했고, 당시로선 거금이었던 1,000만 원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수십 명을 용의선상에 올렸지만 뚜렷한 혐의점을 찾지 못했고, 별다른 단서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사건 발생 1년 후 수사본부는 해체됐고, 공소시효인 2014년 11월 4일까지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공소시효 착각해서 자백?
잊혔던 사건은 김씨가 지난해 6월 방송에서 이 변호사 살해를 교사했다고 자백하면서 새 국면을 맞게 됐다. 김씨는 자신이 조직폭력배 조직원으로서 두목(2008년 사망) 지시로 범행을 계획했고, 같은 조직원이자 동갑내기 친구 손모씨(2014년 사망)에게 범행을 교사했다고 밝혔다. 그는 방송에서 범행에 쓰인 흉기 등에 대해서도 진술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해외에서 귀국할 때 여비라도 마련해보려고 방송에서 범행 사실을 밝혔다"고 진술했다. 수사 당시 일부 유족이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했던 터라, 김씨는 자기가 자백하면 유족들로부터 '오해를 풀어주고 피해자 원혼을 달래줬다'며 사례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안팎에선 김씨가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됐다고 여겨 방송 출연을 결심했다는 말도 나온다.
경찰 “공소시효 아직 살아 있다”
제주경찰청은 방송을 토대로 재수사에 착수했다. 지난해 7월 1일 김씨를 입건했고 올해 4월 체포영장을 받아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요청했다. 마침 김씨는 지난 6월 23일 캄보디아에서 차량 이동 중 현지 경찰에 의해 불법체류자로 검거됐고 이달 5일 추방이 결정됐다. 경찰은 지난 18일 국내로 강제 송환된 김씨를 검거해 살인교사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제주법원은 지난 21일 “도주 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범인이 형사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국외로 도피한 경우 해당 기간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형사소송법 제253조와, 2015년 7월 31일부터 시행돼 살인죄 공소시효를 폐지한 개정 형사소송법(일명 '태완이법')이 그 근거다.
경찰 논리는 이렇다. 김씨의 출입국 기록을 분석한 결과 그가 공소시효 만료 전 여러 차례 출국해 8개월 이상을 해외에서 체류했다. 따라서 공소시효 만료일은 2014년 11월 5일 0시가 아니라 여기에 해외 체류 기간을 보탠 2015년 8월 이후이고, 시효 만료에 앞서 개정 형사소송법이 발효된 만큼 이 사건은 태완이법 적용 대상이라는 것이다. 살인죄 공소시효는 살인범뿐 아니라 살인교사범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가 형사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해외로 도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증거도 확보했다"고 말했다.
경찰 "추가 물증 있다" 입증 자신
경찰은 김씨가 공범으로 언급한 조직폭력배 두목과 손씨와의 관계, 범행 동기, 배후 여부 등을 집중 수사할 예정이다. 경찰은 김씨의 살인교사 혐의 입증을 자신하는 분위기다.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김씨의 자백을 뒷받침할 추가 증거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또 김씨가 직접 이 변호사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가 흉기 모양 등 범행 현장 정보를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 근거다.
하지만 이번 재수사가 경찰도 예상하지 못했던 김씨의 돌발 진술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가 두목과 손씨 모두 이미 사망한 만큼, 김씨가 조사 과정에서 진술을 번복할 경우 혐의 입증이 쉽지 않을 거란 관측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제주경찰 관계자는 “입증이 쉽지 않은 사건이지만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김씨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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