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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만에 무죄...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인생의 족쇄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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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만에 무죄...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인생의 족쇄 풀렸다"

입력
2021.08.13 07:46
수정
2021.08.1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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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김성만씨
2018년 5월 재심 개시, 검찰 2번 항소 끝에?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 36년 만에 마침표

1985년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관련 내용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 KTV 대한뉴스 유튜브 채널 화면 캡처

1985년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관련 내용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 KTV 대한뉴스 유튜브 채널 화면 캡처

"상고를 기각합니다."

지난 7월 29일 대법원 2호 법정. '구미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김성만, 양동화씨에게 대법원은 무죄판정을 확정했다. 무려 36년 만의 기다림 끝에, 두 사람은 '간첩'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미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조작 사건으로 꼽힌다.

1985년 9월 9일 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는 미국과 서독 등에서 유학하던 학생들이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5·18 민주화 운동 진실규명 등을 요구하는 학생 중심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그해 2월 치러진 총선에서 김대중, 김영삼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의 선전으로 위협을 느낀 전두환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 사건이었다.

이 일로 김성만씨와 양동화씨는 사형을, 나머지 13명도 무기징역 등 실형 선고를 받았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광복절 사면으로 겨우 풀려났다. 석방되고 약 20년이 지난 2017년 9월, 이들은 국가 폭력에 희생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용기를 내 재심 청구를 했고 2018년 5월 개시됐다. 그리고 2020년 2월 14일 재심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검찰은 "자백을 보강할 증거가 있다"며 김성만, 양동화씨에 대해 항소했다. 그러나 2심(2020년 8월 21일)도 무죄. 검찰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또다시 항소를 했고 결국 대법원까지 간 끝에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길고 긴 기다림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간첩이라는 굴레 속에 살았는데, 모든 족쇄가 풀려나가는구나, 이제는 풀리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미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김성만씨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12일 TBS 라디오 '이승원의 명랑시사'와의 인터뷰에서다. 그는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사형 확정수로 2년 3개월, 이후 특별 사면 되기까지 13년 2개월을 복역했다.

김씨는 재심을 결심하고 진행하는 동안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을 마주하는 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김씨는 "30년 동안 제 머릿속에서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봉해놓은 기억을 다시 꺼내 억울한 점을 진술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제가 안 지은 죄도 법정에서 지었다고 진술하는 그런 기록을 보면서 그때의 제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그래서 며칠을 울기도 했다. (기록을) 15분 동안 읽고 가슴이 너무 뛰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보고 이런 식으로 준비를 했다"고 당시의 힘겨웠던 과정을 전했다.

이런 김씨에게 검찰의 항소는 너무도 가혹하게 다가왔다. 김씨는 "저의 경우 북한대사관을 방문해서 그 사람들과 토론하고, 여행경비를 지원받았다는 게 문제라는 건데, 검찰 측에서는 그 외에 어떤 간첩활동에 대해선 하나도 입증하지 못했고, 결국 상고심에서도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게 된 것"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고문의 기억, 사형수로 수감됐던 기억은 아직도 그를 몸서리치게 한다.

김씨는 "안기부에서 두드려 맞을 땐 온몸에 살색이라고는 없었다. 고문을 참느라고 스스로 아랫입술을 깨물어서 피가 나오도록 하며 그 힘든 과정을 겪었다"고 모진 기억을 떠올렸다.

고문보다 가장 두렵고 힘들었던 시절은 사형 확정수 기간이었다.

김씨는 "우리나라는 사형 집행을 미리 예고를 안 해준다. 그냥 문을 따면 나가서 죽는 건데, 사형 집행 날은 굉장히 조용하다. 단지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끌어내려고 교도관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니는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이다. 점점점점 크게 들려오면 제 앞으로 오는 거고, 만약에 제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면 끌려 나가서 죽는 거다. 조금씩 작아지면 다른 사람 끌어내러 가는 거고, 이게 30분이 지나면 또 시작된다. 사형을 집행하고 죽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로 죽음을 가늠할 수밖에 없었던) 사형수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무죄 판결로 억울함을 벗었을지 몰라도, 김씨의 지난 인생은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다. 김씨는 그래도 한평생 따라다녔던 간첩이란 인생의 족쇄를 풀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술자리에 가도 농담 삼아서 '쟤는 간첩이야' 이러는 자리에 가고 싶겠어요. 저뿐 아니라 사건 관계자들이 전부 다 대인기피증에 걸려 몇십 년을 살아왔는데, 인생을 꽉 옥죄고 억누르고 있었던 굴레가, 족쇄가 풀려나가는구나. 이제는 풀리겠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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