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 맞서며 당대 시인들과 교류도
"개발 논리 밀려 문화적 가치 훼손 안돼"
항일시인인 고(故) 신석정(1907~1974) 시인이 거주하며 자취를 남긴 ‘비사벌초사’가 재개발사업 지구에 포함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고택을 보존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북 전주시 남노송동 전북병무청 인근에 자리한 비사벌초사는 시인이 1961년 부안에서 전주로 이사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14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시인은 생애 시집 5권을 냈는데 이 중 '빙하' '산의 서곡' '댓바람 소리' 3권을 여기서 집필했다. 고택 이름은 전주의 옛 지명 ‘비사벌’과 볏짚으로 지붕을 인 집을 뜻하는 ‘초사’를 결합해 시인이 지었다. 비사벌초사는 전주시 미래유산 14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마을모임 노송태산목회 신성하 대표 등은 '문화재를 헐어내고 아파트를 세울 수는 없다'며 지난 4일 '비사벌초사 보존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고택 보전 범시민운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재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주민들은 이곳이 전주시내 대표적 낙후지역이란 점을 들어 사업 중심지에 자리한 비사벌초사를 보존한 채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갈등을 빚고 있다.
보존대책위원회는 10일 보도자료를 내 "비사벌초사를 통해 시인의 선비정신과 민족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다각적인 고택 보전운동을 벌여 나가겠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김승수 전주시장과 면담해 고택 보전 방안을 논의한 뒤 민족혼 말살에 항의하는 집회와 서명운동도 추진하기로 했다. 전주시와 시의회는 고택 인근에 '신석정 문학관'을 건립하는 방안도 건의할 예정이다.
이처럼 고택 보존운동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시인의 남다른 민족혼 때문이다. 시인은 일제에 항거해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절필했고,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에 맞서기도 했다. 1961년 조국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시 세 편을 발표했다가, 남산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신성하 대표는 비사벌초사가 집필활동 외에 당대 시인들과 교류했던 사랑방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보존가치가 높다고 강조했다. 이 고택에는 이병기, 박목월, 김영랑, 김남조, 박두진 시인 등이 자주 들렀다.
대책위 고대운 공동대표는 “시인은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등 어려운 시기를 살아오면서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고 시대정신을 보여줬으며, 삶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전주 노송동 일원을 떼어놓고선 말하기 어렵다”면서 “문화도시로서 자긍심을 지켜야 할 전주에서 개발 논리에 밀려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면 병무청구역 재개발 조합추진위원회 측은 "노후 주택이 빼곡해 재개발 사업을 서둘러 재개하라"면서 "고택을 아파트 단지 내 근린공원으로 이전시켜 보존하는 대안을 전주시에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부안에서 태어난 신석정 시인은 1939년 첫 번째 시집인 '촛불'을 통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의 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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