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올림픽 빛낸 스포츠맨십 명장면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2020 도쿄올림픽이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안전 문제, 외교 논란이 겹치며 '올림픽 보이콧' 요구가 빗발치는 등 출발부터 불안한 올림픽이었다.
그러나 5년 동안 피땀을 흘리며 준비한 선수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무대였다. 대신 선수들은 17일 동안 국민을 웃고 울리며 감동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선수들이 보여준 스포츠 정신은 올림픽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였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패배에 멋지게 승복한 세계 각국 선수들이 보여준 매너를 정리해 봤다.
따뜻한 매너로 사람들 챙긴 '브레드 언니' 김연경
국제배구연맹이 '10억 명 중 한 명 정도 나올 선수'라고 극찬한 배구 여제 김연경은 경기를 뛸 때마다 집중 조명을 받았다. 별명 '식빵 언니'는 이제 '브레드 언니'로 전 세계에 뻗어나갔다.
김연경은 경기력은 물론 매너에서도 최고 선수다운 면모를 보였다. 4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여자 배구 8강전 터키와의 경기에서 하미드 알루시 주심의 석연찮은 판정이 계속되자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레드카드를 받았지만, 자칫 경기 분위기가 넘어가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총대를 멘 것이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 김연경은 월드클래스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증명했다. 그는 경기 운영진석으로 다가가 알루시 심판에게 악수를 건넸다. 당시 자신이 항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서 오해를 풀었고, 두 사람은 가벼운 장난을 치며 미소를 지었다.
김연경의 매너는 경기장 밖에서 더욱 빛났다. 그는 독자 도시락 제공에 대한 일본의 트집에 시달려야 했던 급식 지원센터 영양사들도 살뜰히 챙겼다. 한정숙 급식 지원센터 영양사는 지난달 22일 지원센터 현장을 공개한 MBN유튜브 채널 온마이크 인터뷰에서 김연경에게 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개했다.
김연경이 한 영양사에게 '저희 이제 연습 끝났어요. 도시락 아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먹고 힘낼게요'란 감사 문자를 보냈다. 한 영양사는 이에 "급식 지원으로 나오면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선수들이 '힘이 된다'는 문자 메시지에 굉장히 기쁘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패자' 조구함 매너에 日서도 극찬
승자가 아닌 패자가 보여준 스포츠 정신은 올림픽을 지켜본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유도의 조구함이 보여준 매너에 세계는 극찬을 보냈다. 조구함은 지난달 29일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유도 남자 100㎏ 결승전에서 상대인 일본의 애런 울프와 연장전까지 간 끝에 아쉽게 금메달을 놓쳤다. 그러나 조구함은 승자인 울프의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조구함은 유독 올림픽과 인연이 없어 불운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속상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밝게 웃으며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지만, 상대가 강했다. 패배를 인정한다"며 "다시 일어나 챔피언 자리에 도전하겠다. 파리올림픽으로 향하는 동기가 됐다"고 말했다.
세계 랭킹 2위인 포르투갈의 조르지 폰세카와 붙은 준결승전에선 왼손에 쥐가 난 폰세카를 위해 기다리거나, 왼손 대신 소매를 잡으며 배려했다. 조구함은 승리하자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터뜨렸고, 폰세카는 조구함을 끌어안았다.
일본인들도 조구함의 매너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조구함과 울프의 시합을 지켜본 일본 누리꾼들은 트위터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스포츠맨십의 표본" "서로 존경을 표하는 훌륭한 올림픽" "이번 올림픽의 명장면"이라고 치켜세웠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달 3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조 선수의 매너까지 빛난 경기"라며 "국민들께 큰 기쁨을 선사해줘 고맙다"는 축하 글을 올렸다.
태권도 이대훈 "승자 축하해 주는 게 선수의 도리"
패자가 승자를 축하하는 아름다운 장면은 격투 종목에서 유독 많이 나왔다. 태권도에선 이대훈과 이다빈 모두 승자에게 엄지를 세웠다. 한국의 태권도 간판 이대훈은 지난달 25일 지바 마쿠하리 메세 A홀에서 열린 남자 68㎏급 동메달 결정전에서 중국의 자오솨이에게 패했다. 2012 런던올림픽부터 3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한 이대훈이 메달을 따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으로 이변이었다. 그러나 이대훈은 자오솨이에게 다가가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덩달아 그가 2016 리우올림픽 때 보여준 매너도 재조명됐다. 이대훈은 당시 68㎏급 8강전에서 요르단의 아흐마드 아부가우시에게 져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경기가 끝난 뒤 아부가우시의 손을 번쩍 올렸다. 패자부활전 끝에 동메달을 목에 건 이대훈은 인터뷰에서 "승자의 기쁨을 극대화하는 게 선수로서 해야 할 도리이자 예의"라며 자신이 승자를 축하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다빈은 지난달 27일 같은 경기장에서 진행된 여자 67㎏ 초과급 결승전에서 세르비아의 밀리차 만디치에게 패해 은메달을 땄다. 이다빈은 패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만디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금메달감 매너를 선보였다. 만디치도 이다빈의 매너에 예의를 갖췄다.
펜싱 선수들이 보여준 매너도 눈길을 끌었다. 최인정, 강영미, 송세라, 이혜인으로 구성된 여자 에페 대표팀은 지난달 27일 마쿠하리 메세에서 열린 단체전 결승전에서 에스토니아에 석패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날 경기 3라운드에감 보여준 송세라와 에스토니아의 에리카 키르푸의 매너는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키르푸가 공격을 시도하다가 다리를 삐끗했는데, 송세라는 정비 시간을 주고자 공격을 멈추고 경기 중지를 요청했다.
키르푸도 매너로 송세라에게 진 빚을 갚았다. 송세라가 공격 도중 균형을 잃어 경기장 바깥쪽으로 몸이 기울자, 키르프는 송세라를 붙잡으며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왔다.
한국 선수들 위로한 외국 선수들
외국 선수들도 멋진 매너로 도쿄올림픽을 빛냈다. 뉴질랜드 축구 대표팀은 지난달 31일 일본 이바라키 가시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갔지만 패했다.
그런데 뉴질랜드 대표팀은 오히려 '일본에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들은 라커룸을 깨끗이 청소한 뒤 화이트보드에 "가시마와 일본의 환대에 감사를 표한다. 우리는 일본에서 매우 좋은 시간을 보냈다"며 "일본과 일본 축구협회의 행운을 빈다"고 적었다. 영어는 물론 일본어로도 쓰며 올림픽 개최국에 예의를 표했다.
일본 대표팀의 나카야마 유타는 1일 인스타그램에 뉴질랜드 선수들이 남긴 화이트보드 메시지와 라커룸 사진을 올렸다. 그러면서 "일본에 온 외국 선수가 일본인의 환대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고 자랑스럽다"고 화답했다.
뉴질랜드 축구팀은 한국에도 멋진 매너를 보여줬다. 지난달 25일 조별리그 1차전에서 한국은 뉴질랜드에 패했다. 경기가 끝난 뒤 뉴질랜드의 크리스 우드는 이동경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지만, 이동경이 우드의 손을 툭 치며 거부했다.
그러나 우드는 뉴질랜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동경이 (경기에 져) 실망했을 텐데 그 상황에 대해 전혀 걱정할 건 없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며 "코로나19로 조심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이동경을 위로했다.
'올림픽 뽀시래기즈' 중 한 명인 배드민턴 국가대표 안세영(19)은 중국 선수에게 스포츠 매너를 배웠다. 지난달 30일 도쿄 무사시노모리 스포츠 플라자에서 열린 배드민턴 여자 단식 8강전에서 안세영은 세계랭킹 2위인 중국의 천위페이에게 패하며 4강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안세영은 온몸을 내던지는 투혼을 발휘했는데, 2게임 막판에 공을 받다가 발목을 접질렸다. 코트에서 뒹굴며 고통스러워하자 천위페이는 바닥에 떨어진 라켓을 안세영의 손에 쥐여주며 괜찮은지 살폈다.
스포츠 정신 몸소 실천한 백전노장들
체력적 열세를 딛고 스포츠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준 선수들도 있다. '뽀시래기즈'의 삐약이 신유빈(17)에게 패한 룩셈부르크의 '탁구 할매' 니시아렌(58)이 주인공이다. 1991년 룩셈부르크 국적을 얻은 중국 국가대표 출신으로, 2000 시드니올림픽부터 다섯 번 연속 올림픽에 출전했다. 올림픽 탁구 사상 역대 최고령인 백전노장으로 신유빈보다 마흔한 살이나 많다.
니시아렌은 지난달 25일 신유빈과 경기를 마친 뒤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내가 시합에 이길 수 있는 한 나는 이 자리에 설 것이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승마 마장마술에 출전한 1954년생인 호즈의 메리 해나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를 몸소 보여줬다. 우리나라로 치면 칠순을 앞둔 나이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올림픽 출선 선수 가운데 최고령으로, 도쿄까지 여섯 번의 올림픽 무대에 섰다. 그는 "내 몸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 한 파리올림픽에 출전하고 싶다"고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상대방 조롱하고 더러운 뒷모습 보인 선수들도
스포츠 정신으로 올림픽을 화려하게 빛낸 선수들이 있다면 반대로 이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선수도 많았다. 자신의 경기가 끝났다며 스포츠 정신에 반하는 행동을 보였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3일 호주 국가대표 선수 중 일부는 선수촌 방 벽에 구멍을 내거나 토사물을 남기고 떠났다고 전했다. 또 호주 럭비·축구 대표선수들은 귀국 비행기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고 기내 화장실에서 토한 뒤 치우지 않았다고 호주 언론이 보도했다.
멕시코 소프트볼 대표팀은 선수촌을 떠나면서 유니폼과 운동화, 글러브를 버렸다. 멕시코의 한 복싱 선수가 지난달 29일 쓰레기통에 버려진 이들의 유니폼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알려졌다. 비난이 쏟아지자 멕시코 소프트볼 대표팀은 SNS를 통해 사과문을 올렸다.
중국 선수와 중국 언론은 이번 올림픽에서 전 세계를 실망하게 했다. 지난달 27일 도쿄 무사시노노모리 종합 스포츠플라자에서 열린 배드민턴 여자 복식 조별리그 D조 3차전에서 김소영-공희영 선수와 겨룬 중국의 천칭천-자이판 선수의 경기가 그랬다.
천칭천은 경기 도중, 경기가 끝난 뒤에도 '워차오(我操)'라고 크게 외쳤다. 기합소리인 줄 알았지만, 영어로 'F×××'에 해당하는 심한 중국어 욕을 한 것이다. 대만 누리꾼들은 천칭천이 워차오 외에도 어머니를 모욕하는 욕설을 했다며 "경기 내내 욕설이 가득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사과는커녕 중국 언론은 김연경을 끌어들이며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중국 매체들은 리우올림픽 배구 경기에서 김연경이 욕설을 한 걸 지적하며 "한국 사람들은 김연경이 욕을 한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따졌다.
일본 서핑 선수인 이가라시 가노아는 자신과 붙었던 브라질의 가브리엘 메디나를 대놓고 조롱했다. 브라질 팬들이 이가라시의 승리에 홈 어드밴티지가 작용했다고 비판하자, 이가라시는 지난달 28일 트위터에 "떠들어라, 울어라 울어. 난 행복해. 하하하"라는 글을 남겼다. 또 브라질의 모국어인 포르투갈어로 비꼬는 글도 남겼다.
이가라시는 논란이 커지자 하루 만에 "참을성이 없었다"며 사과했지만, 그가 딴 은메달의 빛은 퇴색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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