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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두 여성, 어쩌다 거대한 장기판의 말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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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두 여성, 어쩌다 거대한 장기판의 말이 됐을까

입력
2021.08.02 04:30
수정
2021.08.02 11:50
19면
0 0

12일 개봉하는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
김정남 암살에 휘말린 두 여성 관련 미스터리 그려

영화 '암살자들' 중 한 장면. 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됐다 석방된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왼쪽)와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 더쿱·왓챠 제공

영화 '암살자들' 중 한 장면. 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됐다 석방된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왼쪽)와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 더쿱·왓챠 제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 암살에 가담한 혐의로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던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는 오랜 재판 끝에 풀려난 뒤 말한다. “그 북한 사람들은 저와 제 삶을 아무 가치도 없는 물건처럼 취급했어요.”

수감되기 전 시티와 일면식도 없던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도 같은 혐의로 체포돼 교수형 직전까지 갔다. 우여곡절 끝에 석방돼 연예인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귀국하지만 이후 수많은 비난에 직면한다. "전엔 세상이 분홍색이라 생각했지만 진짜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젠 알아요."

12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은 2017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벌어진 김정남 독극물 살해 사건에 연루된 두 여성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이들은 대체 어쩌다 북한의 권력 다툼에 휘말린 걸까. 정말 두 여성은 자신들의 손에 독극물이 묻은 걸 모르고 김정남의 눈에 이물질을 묻힌 걸까.

'암살자들'은 비틀스의 비서에 관한 영화 '프레다,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틀스', 캘리포니아 동성혼 금지에 맞선 투쟁을 담아 선댄스 감독상을 받은 ‘더 케이스 어게인스트 8' 등의 라이언 화이트 감독이 연출했다. 지난해 초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이 영화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예술영화로 인정하지 않아 극장 개봉이 불투명했으나 재심을 거쳐 결정이 번복되면서 개봉이 결정됐다.

화이트 감독은 두 여성이 누구이며 어떻게 사건에 가담하게 됐는지부터 시작해 수사 및 재판 과정을 2년간 천천히 들여다보며 영화를 완성했다.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사건을 추적하던 감독은 결국 이들이 거대한 장기판의 말이라는 확신에 이른다. 감독은 지난달 28일 화상 기자회견에서 "제작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들이 유죄라고 생각했다"면서 "이들이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다큐멘터리로서 매력적이겠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 언론간담회에서 라이언 화이트 감독이 화상을 통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점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암살자들' 언론간담회에서 라이언 화이트 감독이 화상을 통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장남으로 한때 북한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를 뻔했던 김정남 암살 사건은 관심이 높은 사안이라 국내에 비교적 상세히 알려져 있다. 기존에 알려진 것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정보나 관점을 제시하진 않지만, 영화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돕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산과 이혼을 겪은 뒤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아이샤와 배우를 꿈꾸며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도안은 둘 다 가진 게 없는 이주 여성들이었다. 몰래카메라 촬영에 응해주면 돈을 주겠다는 북한 공작원들의 제안을 덥석 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북한 용의자 4명이 사건 발생 직후 말레이시아를 빠져나가면서 수사는 혼란에 빠졌다. 유일하게 체포된 화학자 리정철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세 풀려났다. 감독은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 베이징지부장과 말레이시아 현지 매체 기자 등의 말을 인용해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긴밀한 외교 관계 때문에 초동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영화 '암살자들' 중 한 장면. 2017년 2월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탑승 시각을 확인하는 모습이 담긴 CCTV 화면. 더쿱 왓챠 제공

영화 '암살자들' 중 한 장면. 2017년 2월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탑승 시각을 확인하는 모습이 담긴 CCTV 화면. 더쿱 왓챠 제공

영화는 4년 전으로 돌아가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일어난 독극물 암살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재구성하는 한편, 북한의 권력 암투와 복잡한 국제 관계에 휘말려 2년간 고통을 겪어야 했던 두 여성의 비극을 전한다. 형제 살인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외교에도 활용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냉혹하고 비정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화이트 감독은 "두 여성을 영화 촬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과정과 1,000시간이 넘는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인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영화를 제작하며 북한의 감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느꼈다고 한다. 화이트 감독은 “당시 (북한 소행으로 알려진) 소니 해킹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미 연방수사국(FBI)의 상담을 받기도 했다”며 “2년간은 추적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길을 걸을 때도 항상 뒤를 돌아보며 다녔고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다시 찍을 생각은 없다면서도 "누군가 만든다면 김정남 암살 사건 후 사라진 그의 아들(김한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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