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 식약청, "긴급 사용 승인한 적 없어"?
"임상시험 중, 코로나 치료제 아니다"?
SNS 소문과 오보로 구충제 값만 급등?
정·관·재계 얽힌 의혹 사건으로 비화
'구충제 이버멕틴(Ivermectin),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치료용 긴급 사용 승인'.
15일 인도네시아 여러 매체에 등장한 저 뉴스는 오보로 밝혀졌다. 승인 주체인 인도네시아 식품의약품감독청(BPOM)이 공식 부인해서다. 게다가 명백히 다른 두 용어(치료용+긴급 사용)를 섞어 만든 그릇된 조어(造語)다. 관련 내용을 보도한 다수 매체는 결국 기사를 삭제했다. 정작 현지 기사를 번역해 보도한 한국 일부 매체의 기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에선 오보 사태를 넘어 '구충제 게이트'로 비화하는 분위기다. 어느 부분이 오보이고, 논란이 어떻게 커졌는지 30일 한국일보가 따져 봤다.
이번 사태는 인도네시아 일선 의료 현장에서 문제의 구충제 이버멕틴이 코로나19 치료제로 쓰이면서 비롯됐다. 일부 정치인과 관료의 입을 통해 이버멕틴이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나고, 실제 일부 의사가 이를 일상적으로 처방하자 한 알에 5,000루피아(약 400원)이던 이버멕틴 가격은 10배 이상 치솟았다. 사재기 열풍에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이버멕틴은 본디 머릿니와 옴 등을 치료하는 약이다.
문제가 커지자 BPOM은 지난달 22일 "임상시험을 통해 이버멕틴의 코로나19 예방 및 치료 효능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직 임상시험 정보가 확보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버멕틴 사용의 심각한 부작용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엿새 뒤 BPOM은 이버멕틴의 임상시험을 승인했다. 그러나 당장 다른 치료약을 구할 수 없던 일반인들은 의학 관련 전문지식이 없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명인 등을 통해 널리 퍼진 구충제의 효능을 오히려 맹신했다. 심지어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일부 교민도 한인 커뮤니티에 구충제가 코로나19 치료제라는 글을 올렸다.
13일 BPOM이 이버멕틴을 포함해 8가지 약물을 코로나19 치료제로 긴급 승인했다는 안내장이 떠돌았다. BPOM 서명이 들어간 안내장은 국영기업부 고위 관료가 언론에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언론은 이를 바탕으로 15일 'BPOM, 이버멕틴 긴급 사용 승인' 기사를 잇따라 내보냈다. 연합뉴스는 현지 기사를 번역해 보도했고 이를 인용한 국내 매체도 여럿이다. 다음 날 한국에선 관련 종목 주가가 급등하기도 했다.
BPOM은 21일 "이버멕틴을 코로나19 치료제로 '긴급사용승인(Emergency Use Authorization·EUA)’한 바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치료목적사용승인(Expanded Access Program·EAP)'을 했을 뿐 여전히 이버멕틴은 코로나19 치료제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EUA와 EAP 약물이 함께 적혀 있어 생긴 오해"라며 "이버멕틴은 적어도 (임상시험)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10월 전에는 EUA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아울러 제약업계에 이버멕틴을 코로나19 치료제로 홍보하지 말 것을 명시적으로 요청했다. EUA라고 단정한 기사들은 가짜 뉴스, 오보가 된 셈이다.
EUA와 EAP는 명백히 다르다. 혼용해 사용해서도 안 된다. EUA는 임상시험을 통해 치료 효과가 검증됐으나 시판까지 복잡한 승인 과정을 단축해 긴급히 사용하도록 승인하는 걸 가리킨다. 이 때문에 부작용을 검증할 시간이 부족해지는 단점이 있다. 코로나19 백신 등이 해당된다. 이제야 임상시험에 들어간 이버멕틴은 EUA 대상 자체가 아니다.
반면 EAP는 다른 치료 수단이 없거나 생명이 위태로운 말기 환자의 치료를 위해 해당 질환의 치료용으로 시판이 허가되지 않은 임상시험용 의약품이더라도 일단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는 제도다. 즉 EAP 약물은 최악의 경우 의사 감독하에 쓸 수는 있지만 치료 효과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현재 코로나19 치료 효능 여부를 임상시험 중인 이버멕틴을 통상적인 치료용 약물, 치료제로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임상 자료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이버멕틴은 특별한 치료 환경에서만 사용돼야 한다"고 경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국도 현재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결국 인도네시아에서 구충제 이버멕틴이 '치료용 긴급 승인됐다' 또는 'EUA됐다'는 보도는 오보다. EAP는 이버멕틴을 일반적인 코로나19 치료제로 쓰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카르타 거주 한인 의사는 "현지 의료 사정이 열악해 이버멕틴, 타미플루 등 여러 약물이 코로나19 치료제로 남용되고 있는데도 최근 사망자 급증 상황이 이어지는 걸 감안하면 주변에서 좋다고 해도 처방 없이 약을 복용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설상가상 구충제 논란은 부정부패 의혹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비(非)정부기관으로 영향력이 상당한 부패방지위원회(ICW)는 이버멕틴이 코로나19 치료제로 둔갑하는 과정에 정치인과 공무원, 기업인 간 연계 의혹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현 정부 고위 관료와 여당의 유력 정치인 이름도 거론된다. 이들은 즉각 반박하며 주장 철회와 사과를 ICW에 요청했다. BPOM은 이버멕틴 생산업체가 불법 원료를 사용하고 규정에 어긋난 홍보 활동을 한 사실을 적발했다. 결국 해당 업체는 과잉 광고에 대해 사과하고 문제의 제품은 구충제라고 명확히 밝힌 뒤 유통된 제품들을 회수했다. 다른 생산업체는 이버멕틴의 코로나19 치료 효과 여부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가 없다고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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