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에너지 법안' 미리 받아본 영국 왕실
"토지 강제 매각 적용 대상서 제외해 달라"
왕실 요구대로 수정안 만들어 의회 통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측이 탄소배출 감축 법안의 적용 대상에서 ‘여왕 사유지’를 제외해 달라고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에 로비를 했다고 볼 만한 정황이 드러났다. 관례상 여왕은 의회에 법안이 상정되기 전에 그 내용을 미리 검토할 수 있는데, 이 절차를 이용해 ‘입김’을 가했다는 의혹이다. 현지에선 ‘여왕 특권이 과도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28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왕실은 올해 1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녹색 에너지 법안(green energy bill)’과 관련해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에 “토지 강제수용 범위에서 여왕의 사유지를 빼 달라”고 요구했다. 이른바 ‘난방 네트워크 법안’으로도 불리는 이 법안은 스코틀랜드 탄소배출 감축 계획의 핵심으로, 화석 연료 보일러를 대체할 재생에너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게 골자다. 이를 위해 정부가 소유자로부터 강제로 토지 매입을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스코틀랜드 최대 토지 보유자 중 한 명인 여왕을 ‘예외 대상’으로 해 달라는 게 왕실의 요청이었다.
실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이를 받아들였고, 의회는 지난 2월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른바 ‘여왕 동의권(Queen’s consent)’ 덕분에 가능했다. 영국 의회엔 왕실의 이익 침해 가능성이 있는 법안일 경우, 상정 이전에 미리 여왕에게 보고하고 동의를 구하는 관습이 있는데, 녹색 에너지 법안도 이런 절차를 밟았던 사실이 이번에 공개된 것이다. 당시 왕실 변호사들은 “여왕 소유의 토지가 강제 수용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고, 그로 인해 수정안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영국 현지에선 비난 여론이 이어지고 있다. 여왕의 ‘사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법안 수정 로비를 벌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안 표결 당시 반대표를 던진 앤디 와이트먼 전 의원은 “여왕 때문에 수정안이 상정된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며 “토론 과정에서 명시됐어야 할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애덤 터커 영국 리버풀대 헌법학 선임강사도 가디언에 “사람들은 왜 여왕 동의권이 계속 유지되는지 우려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사실상 ‘탄소배출 절감’ 계획에서 자신을 면제해 달라고 한 셈이었던 여왕 측 요구는 그동안 기후변화에 대해 왕실이 보인 태도와 모순된다는 의견마저 나온다. 가디언은 “왕실의 로비는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찰스 왕세자와 윌리엄 왕손의 노력과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실제 찰스 왕세자는 지난달 영국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서도 “기후변화 대응은 너무 오랫동안 미뤄져 왔다”며 각국 정상에 신속한 대응을 요청한 바 있다.
버킹엄궁은 “여왕의 동의는 단순히 형식적인 부분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가디언 조사 결과, 이때까지 영국 왕실의 이익 때문에 수정 과정을 거친 법안은 1,000건 이상인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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